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하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통일의 역군이 된다.”

지난 2년간 수도 없이 이 문장을 외웠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외우지 않으면 재워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희한한 일이다. 아무도 자유가 소중한 것이고, 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만한 일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소중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유가 있는 소중함이 아니다. 소중해야 하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유를 외치지만, 정작 그 자유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왜 설명할 수 없는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왜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그 자유주의에 의해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그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고, 감수하는 것일까?

나는 교과서에서 가르친 자유주의의 환상을 믿었다. 한국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였기 때문에, 북한과의 체제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마르크스는 사회발전 5단계론 따위를 주장한 예언가로서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었다. 페르낭 브로델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다시 떠오른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독점을 추구하는 체제라니! 그 것은 내게 있어 이전까지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들어놓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 이후에야 우리의 인식을 제약하는 구조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거대한 전환>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었다. <거대한 전환>은 흔히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비판하는 시장 자본주의와 허구적 상품화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써의 자유주의는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최근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신자유주의가 유행하는 시대. 신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내면화된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전제로 유통되고 있다는 점에서, 폴라니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새롭게 변화하는 가치를 지닌다.

자유경쟁과 시장의 조절기능을 들먹이며 그것이 경제를 움직이는 지고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우리는 '자유주의 경제철학'이라 부른다. 이러한 철학은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장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니 국가는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는 그저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약과 그 이행이 이루어지도록 질서만 잡아주면 되지 그 이상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괜히 국가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 작은 정부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경제철학은 아담 스미스에서 시작된다. 아담 스미스라는 사람의 사상을 딱 한 가지 개념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은 단 한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얘기야말로 자유시장의 허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 세상은 그냥 ‘자유롭게’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이다.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 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 조정 시장은 허구다’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오늘날 고전의 위치로 인정받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레토릭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거대한 전환>은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은 역사적 실제와 무관하게 시장자유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폴라니는 역사의 사료들을 꼼꼼히 추적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자 국가의 발명품임을 밝힌다. 중세 시대 이전에도 시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시장은 파편처럼 서로 고립돼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자본주의의 탄생을 억제하는 물물교환의 장으로써 존재하기도 했다. 폴라니는 이러한 사회의 성격을 호혜성 사회, 재분배 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전국시장의 탄생 과정을 설명한다. 오늘날의 시장과 유사한 전국적 시장을 탄생시킨 것은 16세기 이후 성립한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국가였다. 중상주의를 신봉한 절대주의 국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보편적인 시장 창출에 앞장섰던 것이다. 시장의 보편화는 국가의 개입과 통제와 폭력의 결과였다. 근대국가의 출현 과정의 부산물로서 전국 규모의 시장이 탄생했던 것이다.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탄생된 전국시장이라는 개념은 18세기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통제되는 시장 대신 자기조정 시장의 형태로 변화한다. 이 자기조정 시장은 사회의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하는 것을 뜻한다. 원래 경제 영역은 사회에 embedded(배태된) 된 것이었다. 경제 체제를 사회로부터 분리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시도였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분리된 자기조정 시장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하고, 이 모순 때문에 자기조정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이다.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이라는 가정이 이 세가지에 관한 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다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없고, 사람과 떼어내어 동원될 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기본적으로 상품일 수가 없는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화하는 것은 시장의 논리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장은 토지, 노동, 화폐를 실제로 거래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시장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폴라니는 이 허구적 상품의 탄생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특히 이 중에서 노동력이 어떻게 상품화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이 허구적 상품에 대한 시장 활동이, 사회의 괴멸을 막기 위한 법적, 정책적 노력을 통해 저지되는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 19세기의 역사는 시장이 경제를 통제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과, 이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회의 반작용의 역사라는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의 도래와 그로 인한 파괴가 상징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스피넘랜드 법을 지목한다. 스피넘랜드 법은 원래 농촌의 빈민들이 도시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로 인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방지하고 빈곤의 심화를 막기 위해 1795년에 영국에서 제정된 법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그 후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오히려 빈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빈민들은 몇 푼 안 되는 급여에 얽매여 짐승같은 삶을 살았고, 지주들은 이를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빈곤은 도시로 확장되고 또 심화되었다. 이러한 빈민의 증가와 관련해서 당시에 쓰여진 책이 바로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이었다. 맬서스는 빈민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며, 필요한 것은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좀 비꼬아서 얘기하자면, ‘굶어죽을 자유’를 허락했다고나 할까?

분명 복지적 성격을 가지고 시행되었던 ‘스피넘랜드법’의 실패는 결국 자기 조정 시장경제에 대한 맹신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1834년의 개혁구빈법 이후 사회는 돌이킬 수 없이, 시장 경제의 질서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노동자에 대해 직접적인 금전 지원이 사라진 대신, 구빈소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 구빈소의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노동자와 빈민을 제외한 부랑자들을 처벌한다.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갈 곳이 없게 된 것이다. 16세기 엔클로저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노동하는 상품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 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폐허가 될 것이다... 인간 노동력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달고 있는 '인간'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시장경제 질서의 탄생과 동시에, 사회의 자기보호라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각종 공장법과 사회법이 제정되고, 노동 계급이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보호운동은, 자기조정 시장과 맞물리면서 위기를 다른 형태로 변주한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실험에 들어가고, 뉴딜이라는 방식이 나타났다. 그리고 파시즘이 나타난 것이다. 흔히들 파시즘은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 히틀러 정권에 국한된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폴라니는 파시즘이 자기조정 시장 붕괴로 인한 대응 중 하나이며, 그 현상은 전 지구적이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정치적 레토릭으로 격하되어 있다. 현재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역으로 노무현 정권의 포퓰리즘적 성격을 나치 제3제국에 비유하기도 한다. 폴라니가 규정하는 파시즘은 다르다. 폴라니는 파시즘이 정치경제체제 차원에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한 세트로 보고 부정하며, 사상적으로는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다고 봤다. 산업과 기계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극대로 올리기 위해서는 기계적 합리성에 따라 전체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또한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은 정치적 집권수단으로써 민족주의를 이용한 것뿐이며, 다른 지역의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형태로도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폴라니의 이러한 분석은 신자유주의 논리가 득세하는 오늘날 새롭게 의미를 지닌다. 상대평가라는 경쟁에 따라서 자신의 지적 성취가 재단되고, TV프로그램 속의 최고 가수들 역시 누군가는 탈락해야만 하는, 지금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 안에는 아무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굶어죽는 사람은, 굶어죽을 만 하니까 굶어죽을 뿐이고, 부자는 부자로 살만하니까 부자로 산다. 하지만 우리는 이 논리에 고개를 저을 수 없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자유는, 세상에 대해 고개를 저을 자유는 빼고서 주어진 것이다. 모든 일은 선택해서 일할 자유는 있지만, 상품으로써의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아갈 자유는 없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건, 여당과 야당이 뒤바뀌건 말건, 경제지표가 좋아지지만 빈부격차는 심화되는 현상을 바꾸지 않는다. 해외의 신자유주의 담론이 수입되고, 삼성경제 연구소를 비롯한 사회 엘리트들에 의해 한국적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폴라니는 어떤 대안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영국의 대처는 자신의 반대파들에게 “그래서 대안이 무엇인가? 대안은 없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주장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것이 당연한 질문도 존재한다. 콧물과 오줌을 한 컵씩 가져다 놓고, 어느 쪽을 먹을 거냐고 질문 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둘 다 거부할 것이다. 폴라니가 던지는 물음 역시 이와 같다. 시장 경제에 대해 긍정하느냐(신자유주의) 부정하느냐(마르크스주의), 혹은 그 중간의 어딘가를 취하느냐(케인즈주의)의 틀에서 빠져나와야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사유이다. 애초에 시장경제라는 체제 자체가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폴라니는 이런 차원에서, 마르크스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등 기존의 정치경제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폴라니는 이 시장경제라는 허구의 개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써, 다시 사회를 들고 나온다. ‘자유주의’라는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회를 얘기한다. 그가 지향하는 경제 체제는 시장이 사회에 묻어들어가는 embedded 시스템이었다. 즉, '혼합 경제'로서 굳이 시장을 제거하지 않더라도 국가와 노동 계급의 개입을 통해 조절 가능한 계획 경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거대한 전환이었던 자기조정 시장경제, 두 번째의 파시즘은 모두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거대한 전환은 지금도 새롭게 가능하다.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낙관을 드러냈다.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폴라니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시대에서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하게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비(非)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자유는 사실, 허구의 자유일 뿐이다. 잠을 자기 위해서 억지로 동의하는 자유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자유가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비(非)자유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체제의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강고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균열이 존재한다. 이성으론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그람시의 경구를 다시 떠올려본다.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길도 있으리라.

by Goldmund | 2011/06/01 23:02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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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세그위버 at 2011/06/01 23:40
얌마 너님의 블로그에 일상은 없냐?ㅋㅋㅋ간만에 포스팅이 왜케 무거워 이러니까 글쓰는게 힘들지 임마
Commented by Goldmund at 2011/06/02 00:24
요즘 글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과제로 쓴거라도 올려보는거임. 의무적으로라도 포스팅 이어가려고ㅋㅋㅋ 그러다보면 일상도 쓰겠지ㅎㅎ
Commented by 어웅 at 2011/06/02 11:11
embedded ...
Commented by Goldmund at 2011/06/02 12:38
순간 내가 철자틀린줄 알고 다시 읽어봤다;;;;
Commented by 어웅 at 2011/06/02 17:37
아니 이번에 특정과목에서 배태 얘기를 많이 들어서
신경제사회학 뭐 이런쪽 ㅋㅋㅋㅋ
Commented by Goldmund at 2011/06/04 18:03
그거 무슨 수업이었냐ㅋㅋㅋ
사회학 재밌어서 열심히 듣고 싶은데

들어야할 전공학점이 워낙 많아버려서;;;; 다음학기는 전공만 열심히 파야할듯.. 전과해버리고 싶을정도지만, 학점이 안나오는걸 어쩔.. 눙물이ㅠㅠㅠ
Commented by Fulton at 2011/06/07 15:45
자유주의라는 말이 지금 이글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함.. Neoliberalism을 Liberalism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상가나 경제학자도 많은데 지금 이 글에서는 두 개념이 너무 지나치게 혼동되어 있음. 그리고 결국 칼 폴라니 역시 자유주의의 전통과 전제 에서 글을 쓰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음.

"폴라니는 이 시장경제라는 허구의 개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써, 다시 사회를 들고 나온다. ‘자유주의’라는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회를 얘기한다. "
비판자들은 칼 폴라니가 시장경제의 목적성과 대의성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가 들고 나온 '사회'역시 허구거나 너무 광의한 개념이 아니냐고 비판한 점을 고민해 봐야함. 서양 사회과학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Commented by Goldmund at 2011/06/07 20:12
Neoliberalism이 Liberalism과는 분명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지적에는 수긍하지만, 어쨌거나 이전까지의 자유주의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싶어서, 자유주의 비판으로 글을 시작하긴 했는데..

글을 쓰다보니 폴라니 역시 자유주의적 전통의 위에서 사유했던 사실과 부딪히는 문제가 있더군요.. 결국 폴라니가 얘기했던 광의적 '사회'를 언급할 수 밖에 없는 귀결... 끝내면서도 좀 씁쓸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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