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리테!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변혁을 선언하며

 2011년 7월 23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정부청사가 폭파되면서 8명이 사망,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어서 노동당 주최 청소년 캠프장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으로 68명의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두 사건을 일으킨 범인 베링 브레이빅은 자신의 테러를 ‘잔혹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인터뷰를 통해 ‘진보주의와 다원주의로 가장한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십자군 성전에 나서기 전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거해야한다는 1500페이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에서 이 테러를 접한 많은 언론들은 브레이빅의 게임중독이나 싸이코패스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범죄자 개인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테러는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것이었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적 범죄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사건을 통해 새롭게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다문화주의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 변화다. 몇 년 전 충격을 주었던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비롯해, 다문화주의에 반감을 지닌 극우파 정치세력의 준동은 전 유럽적인 현상이다. 특히 복지 국가의 모델로 유명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북유럽 4개국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은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몇 년간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난의 결과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복지 예산의 지출을 늘리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다문화주의 실패 선언과 함께 다문화 정책을 포기하는 추세다.

발리바르는 다문화주의가 붕괴되면서 인종적 배제가 일어나는 오늘날의 유럽에 대해 주목할 만한 진단을 내려준다.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인종주의는 과거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는 다르며,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발리바르는 인종주의를 ‘국가의 개입에 의해 중개된 타자와의 관계’로 분석한다. 인종주의의 문제는 어느 특수한 시대의 문제라기보다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제도 속에 기입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대의 인종주의는 제도적 인종주의로써,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발리바르 이외에도 여러 정치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의 국가라는 체계는 국민주체로서의 호명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상상의 공동체’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적 결합은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 체제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포섭의 순간과 배제의 순간은 언제나 동시에 온다. 국민에게 시민권을 준다는 의미는 곧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국민사회국가가 말하는 자유는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자유’가 된다. 특히 EU의 성립과 함께 유럽공동체를 구상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배제는 어김없이 발견된다. 발리바르는 유럽 시민권의 부여대상 역시 회원국의 국민으로 한정하는 과정에서, 유럽 바깥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에 대해서 이중의 배제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시민권의 보편화와 시빌리테의 정치를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 국민사회국가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성급하게 포스트 국민정치나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국가의 해체를 강조하는 관점들조차 선진국들이 지닌 민족주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EU와 같이 배타적인 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이는 세계적인 남북 격차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강화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국가의 종언’을 전제로 한 프롤레탈리아 독재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획 역시 낡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프롤레탈리아 독재란 그 자체로 ‘정치의 종언’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이런 고민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도 많이 공감한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민사회국가의 종언을 얘기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는 단지 대중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및 활동가들이 태어나서 자라온 환경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국가가 보장해주는 기본적 권리들을 해체한 이후의 세상에서 국가 없는 틀을 사고할 수 있는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책임을 스탈린 개인에게만 돌리는 일, 혹은 문제설정의 틀이 레닌에 의해 혹은 엥겔스에 의해 변형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르크스 사후 시대는 급속히 변했고, 계급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기획 자체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인정해야 한다.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코뮌들은 언제나 민중의 피를 뿌리며 비극으로 끝나왔다. 결국 강제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코뮌의 기획은 사실상 국민사회국가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론가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는 포스트-국가의 틀을 대중들에게 설득하고 이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국가의 존재를 필연으로 보고, 국민사회국가의 틀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마르크스적 기획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발리바르는 진정한 정치를 위해 해방, 변혁, 시빌리테의 세 가지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해방이라는 개념은 정치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1789년의 인권선언에 기초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테제가 그 핵심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권리가 존재하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 선언한 ‘해방’은 지극히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에 불과했다는 난점이 있다. ‘변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타율성에 대해 얘기한다. ‘변혁’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구조와 정세이다. 마르크스가 선언한 것처럼 정치 역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류 역사는 인권 선언을 기초로 한 권리들의 확장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들의 투쟁사라는 점에서 해방과 변혁이라는 개념은 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다.

하지만 이 변혁이라는 개념 속에는 언제나 퇴행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시빌리테의 정치는 바로 변혁이라는 이유로 동일성의 정치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시빌리테의 정치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동일성들의 히스테리와 관련해 우리가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소통 및 삶의 형식들”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고민이다. 이는 “동일성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고 탈동일화할 수 있는, 동일성 속에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을 위해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차이 및 평등의 권리와 동시에 연대와 공동체의 권리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시빌리테의 정치가 제공해주는 가능성은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지닌다. 특히 공동체 속을 흐르는 동일성의 원리가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한국에서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발리바르가 말한 ‘국가 없는 국가주의’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를 매우 잘 드러내주고 있다. 발리바르 이론이 지닌 장점은 그의 탁월한 ‘정세분석’에서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 속에서 시빌리테의 정치가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정세와 한국적 정세가 다른 부분을 고려해야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많은 좌파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도입해오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한국적 맥락을 수용하지 않고 유럽의 이론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니고 있다. 유럽이 얘기하는 탈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이론적 맥락들은 한국에서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국은 여전히 민족주의의 틀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인종주의와 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 가부장주의 역시 서구보다 강력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언제나 정당이념으로 계급정치를 그 핵심으로 표방하고 있으나, 계급적 틀에 대한 강조는 다른 갈등 축들을 축소하며, 심지어는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잦다.

나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계급갈등 외에도 지역이라는 변수를 무시하는 것은 좌파들의 정치 기획에서 매우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정당들이 자신의 지지층을 결속하는 것은 지방의 일부 공업도시를 제외한다면 언제나 수도권에 한정되었다.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에 지속되어온 호남의 소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진보 정치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호남 소외 문제는 명백히 현존하는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주의는 단순히 전근대적인 유물이나 3김이라는 정치세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동원된 허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지역주의는 명백히 물질적 토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계급갈등과 과잉결정된 형태로 출현했으며, 앞으로 수도권과 지방의 대치구도를 통해 더더욱 계급적인 형태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수도권 과밀화에 따른 지방 소외는 언제나 희생양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지역감정이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계급정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반드시 ‘지역’과 같은 많은 갈등 축들에 대한 고민 없이는 한국에서 무의미하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시빌리테의 개념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 가부장주의와 같은 다양한 갈등 축들을 어떻게 시빌리테의 개념 속에 수용하고 대중들을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다문화 가정을 한국인으로 호명하면서 동일성 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획은 이미 유럽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한국에는 여전히 ‘국민 여러분’은 존재하지만 ‘시민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빌리테의 실천은 결국 대중에게 그 가능성이 존재한다. 대중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상반된 관점이 생각난다. 언제나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대중을 기호로 소비할 뿐이라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기호로 존재하지 않는 살아 숨쉬는 대중을 잡아내는 것이다. 파시즘이야말로 이런 정세 속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언제나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아왔다. 특히 운동권이라는 악의 축을 설정하고 두산이라는 상징 속에서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들이 아무렇지 않게 용인되는 현재의 중앙대 상황은 이런 점에서 파시즘의 출현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반파시즘으로서의 시빌리테라는 개념 역시 지나치게 고압적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시빌리테는 계몽의 폭력성을 배제하는 방식 속에서만 가능하다. 시빌리테라는 개념이 모호한 이론을 넘어서 자연스럽게 생체에 기입되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파시즘의 기획에 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일성의 원리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지양하면서도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 모순되는 과제의 실현이라는 시빌리테의 기획은 결국 풀뿌리 정치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란 상상적 관계가 지닌 많은 가능성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변혁해갈 것인가? 그들의 정치가 아닌 나의 정치, 복지국가를 넘어서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자세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론을 통해 현실에 개입해 나가는 실천이다.

문제는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학창시절 군국주의자나 다름없는 사상을 지녔던 국가주의자였으며, 노무현이라는 기호화된 정치인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던 한 사람의 대중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다수성이 만들어내는 폭력을 직시하게 되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운동권 친구들이 말하는 ‘계몽’의 방식에 굉장한 불편을 느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학내에서 교지편집활동을 하는 운동권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의 변혁과 파시즘적 변혁이 지닌 유사성 속에서조차 가능성을 찾아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행하지 않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여러 이론이 지닌 난해함을 넘어 나의 것으로 소화해내기 위한 깊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요즘이다.

by Goldmund | 2012/01/13 19:53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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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수시렁이 at 2012/01/26 22:16
"최근 몇 년간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난의 결과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복지 예산의 지출을 늘리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윤리를 지식인들이 철저하게 비판해야할텐데, 언급하신 북유럽 복지국가에서 지식인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있는지 모르겠네요. 그쪽 소식에는 어두워서말입니다.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것도 아니니. 제가 그 나라에서 위와같은 말은 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을 겁니다.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당신네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다. 너는 사기꾼이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외국인들과 함께 살기 싫으면 관광객 이외의 외국인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중간계급적인) 알량한 선심을 뒤집어 쓰느라고, 착한 척을 하느라고 외국인들을 받아놓고 이제와서 그렇게 이야기하는게 말이 되느냐?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너희 나라의 일자리를 외국인에게 주지 않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너희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면 외국인들은 더이상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값싼 인건비때문에 몰래 불법체류외국인을 고용하는 업주가 있다면 그 업주를 쳐라. 외국인이 업주를 위협해 일자리를 '빼앗은' 것이냐, 업주가 값싼 인건비 때문에 외국인을 고용한것이냐? 너희는 힘없는 외국인이 너희 일자리를 '뺐었다'고 야바위를 치고 있다. 외국인을 더이상 받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인종차별하는 나라라고 욕을 먹을 거라고? 그러면 욕을 먹어라! 욕 먹기 싫어서 외국인을 받아놓고 외국인한테 화풀이를 하는 게 말이 되는 짓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개새끼다."
Commented by Goldmund at 2012/01/29 14:16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게 얼마나 주목받고 있느냐하는건 다른 애기지만 말이죠.

사실 북유럽사람에게 하는 수시렁이님의 이야기가 국내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Commented at 2012/01/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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