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학과 한국의 정치, 원한의 정치를 넘어서

 19세기는 거대한 계몽의 시대였다. 18세기에 나타난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글자 그대로 기독교의 중세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신의 섭리를 대신해서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다. 이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역사의 진보와 계몽에 대한 신화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학문 체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계몽의 신화를 바탕으로 설립된 실증주의적 관점은 19세기 대부분의 학문에서 주류를 형성했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 소크라테스적 합리주의와, 데카르트가 말했던 코기토적 주체에 대한 신화는 공고한 것이었다. 19세기 독일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헤겔의 철학 또한 이러한 진보와 계몽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니체는 생전에 ‘망치를 든 철학자’를 자처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깊숙이 자리 잡은 신화들을 공격하는 작업이었다. 니체가 보기에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학문체계는 사실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헤겔 철학은 절대정신이 실현된 체제를 향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세계를 상정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 ‘신의 뜻’에 따른 종말론적 세계관 대신 ‘이성’의 힘을 중심에 넣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말년의 헤겔은 나폴레옹을 찬양하는가 하면, 프로이센을 최선의 정치체제로 찬양하는 등 보수화되었는데, 이런 변화는 사실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한계로 보았을 때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니체는 이런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튀빙겐 신학’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의 신화는 19세기 만의 특별한 사유는 아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닌 목적론적 역사 서술은 계몽주의 이전에도 지배적인 사유였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는 지금도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한 학문체계와 계몽의 신화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니체가 자신의 저작에서 보여주는 일관된 기독교 비판은 이런 의미에서 아직도 현재적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절대정신을 비판하기 위해 그만의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계보학은 기존의 역사학이 지닌 보편적인 가치의 중시를 경계한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보편화의 과정에서 휘어지고 상실된 맥락들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니체의 방법론을 계승한 푸코는 계보학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푸코와 들뢰즈 등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개별 맥락들을 복원하고 ‘차이’의 중요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재의 역사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미시역사학, 망탈리테의 역사학 또한 목적론적 역사 서술을 포기하고 사건의 개별 맥락과 우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계보학과 유사하다.

니체가 보기에 보편적 역사관의 핵심은 바로 ‘도덕’이었다.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섞인 잡탕들”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보기에 도덕은 지나칠 정도의 일반화를 추구하면서 타인에게 선을 요구하는데, 그 근저에는 타자에 대한 공포와 무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덕은 결국 무지와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인위적 조작행위에 불과하며,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그는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은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도덕’이라고 일컬어지는 노예도덕을 만들어내는 것이 ‘원한’이었다. 열등감과 좌절된 복수심이야말로 도덕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좋고 나쁨만이 존재했지만, 이를 선악의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적 도덕을 만들어내는 사제의 삶은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특히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무력했다. 또한 청빈, 겸손, 순결과 같은 금욕적 이상을 유지하는 사제의 삶은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장 본래적이어야 할 인간의 삶이 가장 비인간적인 금욕적 이상을 견지하면서 그것을 절대적인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금욕적 관점에서 생긴 원한이 신학과 철학을 만들어내고, 온갖 가치들을 날조하기 때문에 도덕은 결국 노예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한’이라는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많은 접점을 가지는 것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에 따른 욕망의 결핍 또한 일종의 ‘원한’이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실제로 니체의 철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설에 니체의 영향을 최대한 부정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아무튼 19세기 후반 출현한 니체의 계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인간 중심’의 사유를 포기하고 거대한 구조를 발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사상사로 연결되는데 중요한 학문적 분기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학문적 성과를 유사 과학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움직임은 항상 있어왔으며, 실증주의 과학철학이 만들어낸 학문적 체계는 아직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아직도 물질적으로 발전주의 신화가 공고하며, 유교적 가치관이 현실정치로 확산되면서 도덕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오늘날 새롭게 니체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도덕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여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면서 많은 개념들이 상존한다.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정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정치는 자기실현의 도구로 존재한다. 하지만 정치학에서 얘기하는 정치는 다양한 개인들의 상존하는 욕망을 어떤 식으로 보편화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그 핵심에 존재한다. 보편화될 수 없는 욕망들을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한국에서 정치는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는 자신의 실존을 걸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자기실현적이었고, 결국 민주화라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치는 자기실현과 거리가 먼 추상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정치인 개개인의 도덕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치인 집단 전체에 대해서는 불신으로 일관하는 한국인의 정치관은 다분히 도덕주의적이다. 사람들에게 정치적 행위는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배제되었지만,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정치의 필요는 여전하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원한’을 해결해줄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리게 된다. 한국에서 이런 ‘메시아’의 출현은 현재 노무현과 박정희라는 두 대통령에 대한 향수로 표상할 수 있다.

2002년 노무현은 서민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대신,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금융세계화의 전면에 한국을 몰아넣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의 정치는 결코 구시대의 정치와 다른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의 실패와 달리, 인간 노무현은 여전히 성공적이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보여준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이미지는 현 이명박 정권의 무능과 겹치면서 노무현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노무현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시대의 순교자가 되어버리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노무현의 죽음을 접한 대중의 반응이 노무현의 죽음이 타살일 것이라는 음모론으로 나타났다는 점은 원한의 분출이라는 점에서 되짚어볼만 하다.

죽음을 통해 신화가 된 노무현은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적 실패와 무능에 대한 망각을 부르는 동시에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많은 가치들에 대한 신화화와 그 신화의 승계로 이어졌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통해 나타난 유시민, 이광재, 안희정 등을 위시로 한 친노 정치인들의 부활은 그만큼 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노무현 신화는 현재에도 매우 유효하며,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확장되면서 야권에 대한 지지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존재한다. 특히 나꼼수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꼼수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쫄지마 씨팔’이라는 원색적 구호는 ‘가카’라는 적을 상정하면서 대중의 원한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꼼수를 듣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친노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나꼼수가 정치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는 과정에서 억눌린 욕망과 ‘원한’의 해결을 대신해주는 일종의 종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욕망의 대칭에는 박정희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물론 이런 욕망의 근저에는 경제성장의 신화가 만들어낸 발전의 신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역시 박정희 신화의 핵심에 존재하는 개발주의와 국가발전에 대한 신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발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효율성’만을 우선적 가치로 상정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로 대변되는 유능한 경제대통령을 소망한다.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 개인 역시 신화적 상징이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이룬 공로는 박정희 대통령 개인에게 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경제발전의 공로를 박정희가 독식하게 된 것이다. 현재 여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박근혜 대표는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 대통령 박정희의 신화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안철수 후보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 역시 ‘원한’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스펙 종결자’ 안철수가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해줄 메시아가 되어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노무현적 가치와 박정희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해줄 것이라는 열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노무현 지지자와 상당부분 공집합을 이루는데, 그들의 열망은 안철수가 얘기하는 탈정치 노선이 맞닿아 있다. 노무현을 죽인 정치논리에 대한 원한을 바탕으로 모든 정치적인 것에 딱지를 갔다 붙이고 가장 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제거하는 그들의 행위는 한국에서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고 있다.

니체는 ‘원한’을 바탕으로 한 노예도덕을 거부하면서 ‘주인도덕’을 답으로 내세웠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을 발현하는 인간상을 얘기하면서 다원주의를 찬양했지만, 그가 말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보편을 지향한 국가사회주의 파시스트들에 의해 악용당하고 말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파시즘은 단순히 20세기 초 일부 국가들에서 나타난 특수한 정치체제이며, 인류 역사의 실수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실제로 2차 대전에서 가장 대립적이었던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많은 면에서 유사한 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현실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많은 권위주의 통치체제들이 사실 파시즘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파시즘적 통치는 흔히 생각되는 것과 달리 대중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통해 가능하다. 파시즘의 시작은 언제나 투표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집권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 진정한 무서움이 있다. 임지현 교수가 <우리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한 대로 파시즘은 거시적이기에 앞서 미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노무현과 안철수의 추종자들이 가장 정치적인 방식으로 정당정치를 붕괴시키는 모습은 어딘가 1차 대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를 닮아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로 표방되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과 동일시 현상은 파시즘 출현의 기본조건에 해당한다. 또한 좌파정당이 우경화되거나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당시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특징이었는데, 한국의 경우 민노당의 우경화현상, FTA반대집회에서 진보신당 연설자가 폭행을 당한다던가 ‘다함께’와 같은 일부 좌파 세력이 프락치로 몰리는 등 터부가 확산되고 있는 현상 또한 파시즘이 준동하던 시대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대중의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보편화 작업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대중의 원한을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동원하면서 자발적으로 해소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대중들에게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란 언제나 파시즘으로의 이행 가능성이 상존하는 보편화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활동에서 필연적인 보편화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혹자는 법과 제도의 민주화가 언제나 상존하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출현을 저지하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시즘이 출현했던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의 인류가 고안했던 최상의 법률 체계였다는 점에서, 법과 제도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부분이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원한’의 정치로서의 파시즘을 넘어선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니체적인 방식에서 다시 해석하는 주인도덕으로서의 정치를 고민해 보아야한다. 그 것은 적어도 카리스마적 정치인에게 정치를 맡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을 통해 파시즘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 “노동하는 인민대중들은 정치가들의 어깨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어깨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대중들은 노무현과 박정희, 그리고 안철수, 유시민과 박근혜 혹은 이정희나 노회찬 같은 특정 정치인이 상징하는 기호를 소비한다. 그러나 그 기호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오인에 불과하다. 진정한 정치는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가능하다. 법과 제도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갈등들을 제도화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억압의 내면화를 넘어서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고 그 차이들 속에서 보편이 존재함을 사유해야 한다. ‘차이’의 정치 없는 보편적 정치만으로는 파시즘의 도래를 막을 수 없음을 우리는 언제나 인식해야 한다.  

by Goldmund | 2012/01/25 18:46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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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2/01/25 20: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Goldmund at 2012/01/29 14:19
다윈이 도덕의 계보학과 관련있는 인물인가요? 처음 듣는 얘기로군요. 흠...

헤겔의 관념론 철학 쪽에 대해서는 언젠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언제나 마음이 실천으로 향하지를 않는군요.

그나저나 왜 16세기 조선을 특별히 언급하시는건지 궁금합니다. 16세기초의 사화 이후 사림파들의 정치에 대한 얘기를 말씀하시는건가요? 이건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지식의 한계가 분명해서 분석하기 쉽지 않을듯 하네요...
Commented by 백범 at 2012/01/25 21:04
사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아버지같은 정치인, 큰 형님 같은 정치인, 믿고 기대고 의지할수 있는 대상을 찾는 어린아이들입니다. 르쌍띠망에 갇힌 유아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면 이명박이 왜 자신의 잘못 이상,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욕을 쳐먹는지(그렇게 죽일 죄를 지은것도 아니거늘) 그 이유도 충분히 유추해내실 거라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ㅋㅋ at 2012/01/26 02:16
이 사람 블로그 들어가보니 가관도 아니네 라라계집이랑 동급ㅎ
Commented by ㅁㅇㄴㄹ at 2012/01/26 10:38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단의 막연함이 아쉽지만, 그 부분은 구체적으로 구성해 내기가 어려운 부분이지요...
Commented by Goldmund at 2012/01/29 14:20
저거 구성할 수 있는 수준이면, 제가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게 아니라 가르치는 쪽이어야겠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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