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된 청춘에 관한 노트

후배로부터 빌린 소설 한권을 간신히 읽어냈다. 연초에 열흘에 한권씩 책을 읽겠다 따위의 작심삼일을 해놓고 너무 오랜만에 책을 읽은지라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한 권이라도 읽어낸 것이 어디냐 싶은 관대한 기분도 든다. 한동안은 소설과 역사책같이 잘 읽히는 책들에나 만족해야할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표백이야기


<
표백>은 문제작이기 이전에 흥미로운 소설이다. 쉬운 문장과 흡입력 덕에 책장을 넘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어려웠고, 책을 읽는 중간쯔음부터 나는 무언가 두려워서 발작적으로 책장을 덮었다 폈다를 반복해야 했다. 소설이 제공할 결말에 내가 굴복하고 말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함 때문이었다.

어릴 적 나는 위인전의 인물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스물, 스물 하나가 되었을 때 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것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당시의 나는 이류대학에 다니는데다 섹스 한번 해보지 못한 것 따위 갖가지 열패감에 시달리는 멍청이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나의 열패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포기해버렸다. 아니 차라리 포기했으면 괜찮을 것을, 망상하는 단계에 치닫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후 오랫동안 나의 시간은 오롯이 패배자의 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소설의 세연을 조금은 닮아 있었다. 물론 세연은 좁은 사다리를 뚫고라도 성공할 만큼의 재능과 매력이 있고, 나는 그조차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세연의 이야기에 끌어당겨져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었으리라는 생각. 그 생각에 나는 책장을 넘기기가 괴로워졌다.

모든 것은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어있고, 너는 거기에서 부품 이상의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여기 저항하는 방법은 오로지 사회가 규정하는 성공 중 한 가지를 달성한 다음 자살하는 것뿐이라는 세연의 결론.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물일곱 먹은 나는 자신의 재능 없음에 납득했고, 스무살의 예민함 대신 둔감해진 덕에 그러한 결론에 새삼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자살 충동을 느끼는 대신 책을 곱씹어보며 글을 쓸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어쩌면 책의 결말이 디스토피아적 예언의 승리로 끝났다면 나는 심각한 자살충동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친절하게도 탈출구를 열어준다. 휘영, 그리고 주인공 적그리스도는 어떻게든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주인공은 어쨌거나, 비겁자나 변절자가 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새로운 대답을 찾으려한다.

작가의 이런 탈출구 덕에 소설의 종반부는 이전의 전개에 비해 극적이지 않으며 결말은 열리다 못해 뭔가 어중띈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럼에도 작가가 열린 결말을 만든 것은 결국 작가 또한 그 해답을 고민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표백>을 읽는 표백 세대 중의 누군가는 이를 고민했으면 할 것이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휘영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많이 투사된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하필 작가와 같은 직업인 기자라는 점에서, 작가 자신 또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기자로 생활한다는 점, 그리고 어떻게든 비겁자가 아니기 위한 반박을 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나의 대답은 무엇인가, 가장 심플하게 말하자면 결국 거기 대해서는 나도 앞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리라.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스무살의 열패감을 해결하지 못해 여전히 시달리고 있으며, 당시에 계획했던 자살 플랜을 완벽하게 철회하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열패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쾌락보다 고통이 더 큰 삶을 살아야한다는 결론이 확실하다면 자살은 분명 최고의 선택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다만 앞으로 주어진 시간에 따른 발전을 제하고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박을 기록해본다. 우선 표백세대를 정의하는 세계관 자체에 대한 반박이다. 분명 지금의 세상을 살다보면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은 이미 옛날에 전부 이뤄진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한국 사회는 이미 옛날과 같은 dynamic을 상당히 상실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표백세대에게 남은 것이 오로지 사회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뿐 이라는 주장에는 동감하기 힘들다. 장강명의 이런 주장은 마치 헤겔이 사회의 절대의지가 발현된 결과가 프로이센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작가는 한국 사회가 이미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과제를 달성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변혁의 과제는 이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산업화라는 과제만 해도 그런데, modernity가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산업화를 거대한 변혁의 완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보편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가 지나치게 사소하다고 말하는 양성 평등이나 환경’, ‘장애인 인권이나 성소수자 보호또한 누군가에겐 실존의 문제이자 변혁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와 별개로 개인적 차원에서 내가 생각하는 해답은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자살을 택하는 추, 하비, 병권은 모두 주변과 독자적으로 관계 맺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5년 전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프로블레마틱(문제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휘영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결혼이라는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서 이전의 문제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비록 새로운 관계맺음의 결과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라고 할지라도 휘영은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소설의 인물들처럼 자신이 지닌 단 하나의 관계에 의존하고 집착하고, 절망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개개인 단독으로는 단순한 유기물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실존의 알리바이는 다원적 세계 속 하나의 행위자로써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의 개인으로 존재할 때에 비로소 탐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새롭게 관계 맺기 -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를 하고싶다는 신세한탄과 함께 노트를 마친다.

by Goldmund | 2013/03/14 21:3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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