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갈등
2012/12/12   2012 대선에 부쳐 -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4]
2012/01/02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와 갈등의 제도화에 관하여 [3]
2012 대선에 부쳐 -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응답하라 2012, 우리의 선택은 안녕한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는 말이 있다. 지극히 사소한 선택들부터 인생을 결정할만한 중대한 선택들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선택들의 연속일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뽑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2월 19일, 우리의 선택권은 정말 자유롭게 보장될 수 있을까?

잠시 시계를 돌려 5년 전의 선택으로 돌아가 보자. 2007년 수많은 서민들이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약속을 믿고 그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국밥 광고를 통해 유명해진 ‘욕쟁이 할머니’ 강종순 씨는 매출이 반토막나고 월세가 밀려서 시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사투리로 ‘살려주이소’를 외치던 청년백수 이영민 씨는 다니던 일자리를 잃고 지금은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언론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어리석음과 무지함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상황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과 그를 뽑은 사람들에 대한 조롱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의 5년차 국정운영지지도는 언제나 바닥을 기어 다녔다. 특히 2007년 이명박이라는 선택과 2012년 그 선택에 대한 실망은, 2002년 노무현이라는 선택과 2007년 그 선택에 대한 실망과 매우 유사하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집안이 파산했다는 이영민씨가 이명박에 대한 지지연설에서 말한 “노무현을 찍은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는 수사는 결국 “이명박을 지지한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는 식으로 반복될 뿐이다. 5년마다 Cntl+C, Cntl+V 처럼 반복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포기하고 정치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투표율은 매 선거 때마다 역대 최저를 경신하고, ‘뽑을 사람이 없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저 누가 1등이 될 것인가를 놓고 경마 저널리즘에만 바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중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가 하는 결과보다 그들의 정치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하는 문제, 그리고 5년 후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임에도 말이다.

차악을 뽑거나, 그놈이 그놈이거나

흔히들 투표를 두고 ‘차악을 뽑는 행위’라고 말하곤 한다. 투표의 본래 취지가 자신이 지지하는 최선의 후보를 선택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지만, 우습게만 생각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10년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둘러싼 세간의 평가가 그랬다.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와 1% 이내의 접전을 벌이고 석패하자 한명숙 후보의 지지자들은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결과론적으로 노회찬을 지지한 3.3%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오세훈을 시장으로 만드는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이런 주장은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론’으로 한국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진보 정당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가 될 수밖에 없으니 최악을 막기 위한 투표를 하는 것이 올바른 투표라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대부분 선거들은 언제나 ‘민주세력’대 ‘반민주세력’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어 왔으며, 민주세력의 승리를 위해서 좌파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선택할 자유를 빼앗겨왔다. 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의 후보사퇴가 그랬으며, 97년과 02년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의 연이은 승리 또한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론의 결과는 당선된 차악이 곧 최악으로 드러나고, 낙선한 최악이 그 틈을 타 차악의 행세를 하는, 그래서 유권자는 다시 최선보다 차악을 선택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었다. 그 결과 정치인들은 자신이 최선의 후보임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가 최악의 후보임을 보여주는 네거티브 공세와 이미지 정치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특히 이번 대선은 박정희와 노무현이라는 두 전임 대통령의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더더욱 이미지 정치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미지 창출에 몰두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선거는 공약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기반한 구호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올해 대선의 뜨거운 이슈인 ‘경제 민주화’라는 구호 또한 마찬가지다. 2년 전부터 학계와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던 복지국가 담론은 사라지고 후보마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유권자들로서는 그 공약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가운데 ‘경제민주화’라는 실체 없는 구호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차별화되지 않은 후보들 간의 경쟁은 유권자로 하여금 투표의 이유를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대신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를 권리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로, 선택이 아니라 당위의 문제로 해석하는 주장이 그 자리를 메운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20대 개새끼론’을 비롯해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광풍이 몰아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포기하는 것을 의무의 방기라고 해석하는 것은 속편한 해석이다. 투표포기라는 행위는 정치가 그만큼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권리의 행사이기도 하다. 투표는 결코 차악을 뽑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며, 최선의 선택을 투표용지 안에 담아낼 수 없다면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당한 권리의 행사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투표를 포기하는 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에게 존재한다.

‘갈등’의 부재와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갈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적 갈등이란 국회의 공성전과 법안의 날치기 통과, 최루탄 투척 같은 코믹하면서도 폭력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갈등이 없는 정치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며, 그래픽카드 없는 CPU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다양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에 있는데,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에는 다양성이 빠지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이해당사자들 간의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하고, 이런 갈등을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많은 갈등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개인의 문제로 국한될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갈등 대신 ‘통합’과 ‘소통’만이 강조된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대통합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국민을 편가르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문제나 환경문제처럼 명백히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들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힐링하려는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하다. 문재인 후보의 ‘상식이 통하는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정치관을 비상식으로 규정하면서 갈등의 조정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안철수 후보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치를 비효율적인 것, 갈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정치를 혁신하겠다는 주장으로 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예산낭비를 줄이겠다’며 국회의원수 감축, 정당보조금 축소와 중앙당의 공천권 약화를 내세우는 방식의 정치 개혁은 사실 정당을 약화시키는 정치 파괴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필연적인 ‘갈등’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갈등의 사회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할 정당들은 사회의 주요한 갈등들을 공론화시키기를 회피하게 된다. 일례로 올해 대선에서 얘기되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역설 또한 조세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 정당이 갈등의 사회를 포기하는 상황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갈등의 사회화 대신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감정이 이용되면서 지역 기반 정당 체제가 강화되며, 국회의원들 또한 의정활동을 통해 문제제기를 하기보다는 지역구관리에 애쓰게 된다. 정당 체제의 약화는 정치의 책임성 구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에 소속된 박근혜 후보가 같은 당 소속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정체성을 ‘세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또한 정당의 책임정치가 구현된다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정치가 갈등의 사회화와 조정을 포기하면서 사람들은 정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정치효능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는 바로 ‘갈등을 사회화하는 정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동안 20대와 30대의 투표율이 낮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년 문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갈등’으로 의제가 되는 대신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면서, 정치효능감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신의 멘탈을 ‘힐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이라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차악이 아니라 최선을 뽑기 위해

앞서 언급된 정치효능감의 감소가 투표율의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투표시간 연장이 거론되고 있다. 투표시간 연장은 분명, 선거의 결과에 더 많은 비례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투표율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선거제도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들이 필요한 것이다.

학계와 진보정당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결선투표제에 따르면 1차 선거를 치뤄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시, 1위와 2위를 차지한 두 후보는 2주 후에 결선 투표를 통해 승부를 가리게 된다. 만약 결선투표제가 도입된다면 문재인과 안철수는 단일화 방식을 둘러싸고 지루한 싸움을 반복하는 대신 1차 선거에서 2위안에 들기 위해 서로 간의 차별화된 공약을 내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새누리당이 자신의 표 이탈을 막기 위해 전설의 철새 피닉제(이인제)와 다시 손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결선 투표제의 도입은 ‘비판적 지지론’대신 소수 정당과 진보 정당들이 후보를 내서 더 높은 지지를 얻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표를 방지하고 정치적 다원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 1차 투표와 2차 투표 사이에 2주의 시간을 두고서 후보를 검증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과반이 넘는 지지를 얻는 대통령을 탄생시키면서 당선자의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고 국정운영의 동력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결선투표제라던가 정당명부제 등의 도입은 정치적 다원주의와 책임정치 구현의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 그리고 참여다.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가치를 지닌 예술품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다양한 내용물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써의 성격에 있다. 끊임없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독점적 권력의 출현을 방지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런 점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바탕으로 한 행정부의 힘은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한다. 민주주의 권력의 기반인 시민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지만, ‘시민’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정치의 민주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잘 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투표를 기대하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정치를 두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밥그릇 싸움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란 사회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적인 것인 것이기도 하다. 정치의 장이란 결국 자신이 가진 소신과 생각을 표현하면서 타인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는 일종의 대자적 자아 형성의 장인 것이다.

투표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록 투표용지에 기입된 후보들의 이름에 투표를 하지만, 그들은 사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겠다고 말하는 대리인들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투표란 결국 자신를 위한 선택 행위다. 차악을 선택해야 된다는 주변의 말이나, 시대정신 같은 당위는 당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대변해줄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할 권리가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다.

2012년 12월 19일, 투표장에서 당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저히 나를 위해 싸워줄 사람을 찾지 못하겠다면? 그 때는 차라리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당당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 이 글은 <중앙문화> 63호에 실린 글입니다.

by Goldmund | 2012/12/12 20:38 | 트랙백 | 덧글(4)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와 갈등의 제도화에 관하여

1. 서론

2011년 12월 19일, 한국 정치권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한 가지는 매우 가시적이고 큰 것이어서 모든 미디어의 집중적 조명을 받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첫 번째 이슈에 묻히면서 그 의미를 과소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이슈는 북한의 최고 통치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었고, 두 번째 이슈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앞의 사건에 비하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통과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은 늦든 빠르든 일어났어야하는 일이었다면, 학생인권조례의 통과는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장기적으로 급진적 시민운동의 제도적 성취를 위해서 중요한 기원을 이룩한 사례였다.

이 글에서는 E.E 샤츠슈나이더와 최장집의 이론을 바탕으로 갈등의 제도화가 지니는 중요성을 분석한다. 또한 이에 반대되는 급진적 운동론과 대비하면서 양자 간의 모순점과 약점을 지적하며,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통과의 사례에서 드러난 갈등의 제도화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갈등의 제도화- 샤츠슈나이더와 최장집의 이론을 중심으로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정당론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번역되었고, 최장집 교수가 직접 추천사를 쓸 만큼 최장집주의 이론체계에서 중요한 책이다. 우선 내게 있어서 강한 흥미를 끌었던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절반의 주권(Semisovereign)'이라는 수식어는 현실문제로서 민주주의가 가지는 제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이래로 우리가 ‘신민(subjects)’이 아닌 ‘시민’이 되면서 주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역사적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어떤 이상을 투영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특히 2008년 촛불정국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서 민주주의를 낭만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은 굉장히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아마도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민주주의조차 실현되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이 오래 지속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쟁취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단어였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앞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성화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어떤 이상화된 정치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지상 최악의 정치를 구현하고 있는 저 곳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중심이 되는 개념은 ‘갈등’과 ‘정당’이다. 일반적으로 ‘갈등’에 대해서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에게 있어 갈등을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며,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적 역동성이 갈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발전된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갈등의 제도화’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갈등은 범위, 가시성, 강도, 방향의 네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갈등의 범위는, 하나의 갈등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계하는가에 따라서 힘의 균형이 달라지며 결과가 바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시성으로, 가시성이 높은 이슈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세 번째는 갈등의 강도인데, 보다 격렬한 형태를 띄고 많은 관심을 가지는 갈등일수록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진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갈등의 방향이다. 갈등의 가시성과 강도에 따라 갈등에 연관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분파 정당 계급 등으로 분열되고, 정당의 정치 전략이 결정된다. 각각의 갈등의 차원들은 서로 연관된다. 가시성과 강도가 높은 갈등일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며, 방향도 일정부분 결정하게 된다.

갈등은 이익집단 사이의 이해관계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며, 정치 전략은 바로 이 갈등의 차원들에 의해 결정된다. 다수파의 지도자는 특정 방향의 갈등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이용한다. 그러나 반대파는 다수파 연합 내에 잠재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이슈들을 동원하면서 갈등을 대체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기존에 인식되지 않은 갈등이 정당 정치의 공간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주요 의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역동성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 전략의 핵심은 바로 갈등의 치환, 새로운 갈등을 통해 기존 갈등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샤츠슈나이더는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적 영역에서 갈등의 치환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회화할 수 있는 조직은 바로 정당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이야말로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의 동의에 기반한‘ 현실적으로 유일한 정치조직이라고 보면서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고 주장할 만큼 정당 정치를 중시했다. 정당은 유권자의 동원을 위해 갈등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는 반면, 이익집단은 다루는 문제범위가 전국적인 수준에 미치기 어렵고, 조직의 성격 상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이 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갈등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샤츠슈나이더는, 미국정치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다원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익집단들이 중심이 되는 다원주의적 정치구조에서는 정치의 주요 이슈가 부유층 편향으로 형성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샤츠슈나이더는 미국의 낡은 정당들이 갈등을 조직화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는 사람들이 정치체제에 대해 거부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투표율의 저하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요컨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인민들 개개인이 정치적 식견을 가지는 것이 아니묘 제한된 시간과 일상생활 속에서도 평범한 인민들이 정치문제를 쉽게 이해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구조와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역시, 정당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가 내리는 결론이다.

최장집은 샤츠슈나이더의 논의를 한국으로 끌어오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분석한다. 최장집이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문제는 정당정치가 안정화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조직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두 개의 양당은 모두 보수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갈등의 치환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색깔론이나 지역주의를 동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보수 양당 구도에서 기원한다.

특히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를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면서 계급문제가 정당의 핵심 의제로 존재하지 않는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회화되는 갈등의 핵심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며, 정당정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해야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정당정치는 왜곡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적 의견 역시 적지 않다. 샤츠슈나이더는 부유층에 의해 장악되는 이익집단과 달리, 정당은 보편적인 수준에서의 정치활동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정당정치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으로 한정된다. 이는 보수양당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정당을 표방하는 진보정당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문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과연 정당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게다가 갈등은 과연 정당에 의해서만 조직화될 수 있으며, 치환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역시 많은 반론들이 존재한다. 특히 정당 정치가 올바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는 서유럽의 경우에도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권리가 올바로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정당이 이를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 또한 작지 않다. 올해 여름 노르웨이에서 발생했던 브레이빅의 우토야섬 학살은 조직화되지 않는 갈등들의 문제가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3. 조직화될 수 없는 갈등의 문제와 직접민주주의의 한계

알버트 허쉬만은 갈등의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계급과 같이 '(정치로서)나눌 수 있는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나 민족, 성소수자 같은 '(정치로서)나눌 수 없는 갈등'이다. 샤츠슈나이더나 최장집이 말하는 안정된 정당정치는 분명히 정치로서 나눌 수 있는 갈등을 제도화하는 데 있어서는 탁월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해결해줄 수 없는 갈등은 분명히 존재하고, 여기 대해서 최장집주의 이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분명 공백으로 남는다. 허쉬만은 후자의 갈등 같은 경우 정당정치가 아닌, 운동을 통한 해결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정당정치가 가지는 한계는 결국, 정당정치는 선거의 승리를 위해 기능한다는 점에 있다.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회적 강도가 높은 징후들일지라도 그 고통은 정 당들의 중심의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요구되는 대표와 합의에 경과되는 시간 속에서 정당 정치의 희생자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많은 급진민주주의자들은 정당 정치가 가지고 있는 독점적 역할을 해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당은 민주주의의 독점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캠페인과 봉기로 인해 인민 스스로가 부담해야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의 소모를 막기 위한 잠정적 대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 정치를 넘어서서 인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로의 이행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다원화되고 복잡화되고 대규모화된 현대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당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고 다양한 이익집단이 운동을 통해 정치적 액션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 최종적 결과물은 법과 제도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제도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주민들이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게 한다는 주민투표제도의 취지와 달리, 한국의 주민투표제도는 중앙정부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악용되고 있다. 2005년 최초로 시작된 주민투표제도는 경주시와 포항시, 영덕군, 군산시에서 동시에 치러진 방폐장 부지 선정에 관한 것이었으며. 올해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표거부와 투표독려 운동은 주민투표제도가 양날의 검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사례였다.

주민투표제도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직접민주주의제도로 꼽히는 주민소환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민소환제도 도입 이후 전국에서 45명의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소환 투표가 있었지만 시의원 2명 정도가 의원직을 잃었을 뿐 자치단체장의 주민소환이 이뤄진 사례는 없다. 자치단체장을 대상으로 주민소환제도 투표가 진행되었던 사례인 하남시장, 과천시장에 대한 주민소환의 경우 NIMBY현상을 바탕으로 부동산 가격의 문제 때문에 소환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 마저도 낮은 투표율 때문에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예산만을 낭비하고 말았다. 적어도 한국에서 제도적 측면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악용의 소지가 많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마냥 훌륭한 민주주의로의 연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 국가인 스위스는 최근 몇 년 동안 주민투표를 바탕으로 모스크 건설 금지, 부르카 착용 의무화와 같은 반이슬람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법안이 통과되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운용할 주체인 주민들이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지 않다면, 그 제도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당정치의 농경성과 운동의 유목성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들뢰즈적 기획은 철학으로서는 훌륭하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기초가 되는 니체의 철학이 그 참다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파시즘적 기획의 이론적 기초로 전락해버린 데서 볼 수 있듯, 철학적 기획을 섣불리 정치의 영역에 접목시키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다. 대의민주주의를 대신해 직접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정당정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칫 동일성의 폭력만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는 결국 쉐보르스키가 얘기한 것처럼 ‘야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는 체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비어있는 기표’로서의 민주주의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까의 문제이다. 이 채움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권리들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보여주듯,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사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정당정치와 급진적 운동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존해야할 수단이 되어야 한다.


4.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와 갈등의 제도화 사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원안 통과 과정은 갈등의 제도화 과정에서 급진적 시민운동과 정당정치가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가장 긍정적이었던 점은, 소수자들의 권리가 무시되지 않고 제도화되었다는 점이었다는 점이었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난 8월 20일 9만 7천명의 주민 발의를 통해 제출되었다. 주민 발의는 기본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방법에 속한다. 그러나 주민발의는 단순한 ‘의견의 제출’이며 주민소환이나 주민투표제와는 달리 갈등의 제도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제까지 서울시에서 조례가 주민발의에 의해 이뤄진 것은 총 3번이었는데 앞의 두 가지 사례인 친환경급식조례와 광장조례의 경우 이익집단에 의해서 그 의견이 모아졌었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 서명 과정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이익집단이 아니었다. 서명 단위들 중 가장 컸던 곳인 전교조 서울지부조차 고작 7천명의 서명을 얻어온 게 전부였던 반면, 길거리 서명만 3만이 넘는 등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서명이 많았다. 그리고 그 서명들을 모으는 중심에 있었던 것이 청소년 활동가들의 열정이었다.

학생인권조례 운동본부의 구성원 또한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청소년 인권행동‘아수나로’와 청소년의회 등 청소년단체, 불교와 원불교의 인권위원회,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친구사이’등 성소수자단체,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단체, ‘공감’과 민변 등의 법률 단체,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인권단체 등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에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까지 연대를 통해서 주민 발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최장집주의자를 자처하는 논객 송준모씨 역시 트위터를 통해 “학생인권조례 통과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일이지만, 활동가들의 희생과 노고가 제도화되어 결실을 맺었다는 점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활동가들의 헌신이 제도화된 열정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좋은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004년의 친환경급식조례, 2008년의 광장 조례가 모두 제정에 실패한 반면, 학생인권조례는 성공했다. 주민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제도가 긍정적으로 기능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앞으로 주민발의제의 활성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학생인권조례 제정과정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인권조례 상정을 며칠 앞둔 12월 15일에 있었던 서울시의회 점거농성에 있었다. 서울시의회 점거농성의 주역은 다름 아닌 성소수자 단체들이었다. 흔히 LGBT그룹이라고 칭해지는 성소수자 단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들의 상징인 무지개색의 깃발을 들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면서 조직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시의회 점거농성은 기존처럼 다른 단체가 중심이 된 집회에 LGBT단체가 결합하는 형태가 아니라, 성소수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전면에 나섰던 최초의 사례였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아웃팅(이성애자들에게 동성애자임이 알려짐) 당할 수 있는 위험조차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언론에 노출할 수 있는 기자회견 등의 행위를 굽히지 않았다. 성소수자 운동 역사에 있어서 점거농성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승리의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의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들이 주체로 나서게 된 이유는 학생인권조례에 포함된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에 대한 조항 때문이었다. 많은 성소수자들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성적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했던 경험을 크든 작든 가지고 있으며, 2003년에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동가중 한 사람이 학교에서 아웃팅을 당하고 집단따돌림으로 인해 자살하기도 했다. 때문에 성소수자 진영이 학생인권 조례에 포함된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가지는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의 통과에 대한 여론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특히 교총을 비롯한 많은 보수단체들은 학생인권조례가 교육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교권을 침해한다면서 폐기를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성적지향의 문제가 사회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학교에서 교육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왜 교육받아서는 안되며, 사회에서는 합의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지만 이들 단체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동성애를 죄악시하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는 얻을 수 없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이들 반대론자들의 의견에 분노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서울시 교육위원 서윤기씨에 따르면, 학생인권조례를 담당하는 교육위원들을 대상으로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통의 문자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들의 조직화된 힘은 학생인권조례 원안에 보장된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에 관한 조항들을 수정해서 제출하도록 만들었다.

성소수자들은 이런 상황 전개 속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더라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시의회 점거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주의 단체들과 청소년 단체, 인권단체들, 진보신당과 사회당 등의 많은 활동가들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함께 연대했다. 나 역시 농성장에서 별다른 단위 없이 개인적 차원으로 연대하러 갔었다. 물론 농성 과정이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농성장이 지나치게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남성과 이성애자들이 역차별을 받는 경향이 있었으며, 두 그룹은 서로 잘 섞이지 못했다. 특히 기존의 학생 운동권 단체의 연대는 이 경우 거의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분위기를 망치는 역효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수많은 호모포비아의 장벽과, 교권 수호를 위한 보수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거의 원안 그대로 통과되었다. 다만 학내에서의 집회는 허가제로만 가능하며, 그 외의 경우 처벌이 가능하다는 내용, 그리고 두발 자율화에 대해서 학칙을 통해 처벌 가능하다는 단서조항이 따라붙었다는 점에서, 원안통과를 염원했던 청소년 활동가들의 소망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그런데 원안통과의 과정과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당초 인권조례를 발의했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아니었다. 이 두 당은 최근 진보정당 통합과 관련된 문제로 당력을 기울여 소수자 운동에 연대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조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민주당이었다. 농성장을 점거한 성소수자들은 트위터등의 SNS와 오프라인을 통해 민주당(현 민주통합당)을 압박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민주당이 중심이 된 FTA집회에 방문해서 정동영 의원으로부터, 학생인권조례 원안통과 약속을 받았던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정동영의 영향력 때문인지, 원안통과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있던 민주당 또한 원안통과를 당론으로 확정짓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초 원안통과가 불투명했던 인권조례가 통과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정동영과 민주당의 공이 가장 컸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 정동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전북의 지방유지 출신이며, 그가 노동운동에 아무리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동영이 노동을 비롯한 계급과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틈새전략으로부터 기반한다. 친노 세력으로부터 배척받고, 민주당 안에서도 자신의 계파 이외 당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대권 주자급의 지지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좌파정당의 이슈였던 것이다. 십수년전부터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해온 좌파정당의 정치인들에 비하면 진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영의 변신이 한국의 정치진영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진중공업 투쟁과정에서 김진숙을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한 원동력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정동영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정동영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장 그의 지지율이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본인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그가 선택한 전략의 결과가 단시간에 성과를 낼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앞으로도 본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좌파 의제에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크다.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은 학생인권조례의 통과는 분명 정당정치를 바탕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으며, 아마도 한나라당이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구도였다면 통과에 실패했을 거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정치의 보수 양당구도를 깨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달성을 위해서 제시되는 세 가지길 중 하나는 민주당이 좌파의 의제를 적극 반영하게 만드는 방향이다. 그리고 민주당은 ‘복지국가’의제를 통해 느리게나마, 조금씩 계급적 의제를 정치에 반영해나가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면서 계급정치노선을 일정부분 포기한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적어도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정당정치는 여전히 가장 유효한 틀이며, 소수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일정부분은 관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5. 결론 및 제언

앞서 학생인권조례의 과정에서 정당정치의 중요성과 정동영이라는 정치인 개인의 포지셔닝이 가지는 의미에 너무 집중해서 말한 느낌이 있어 보이지만, 정치인 개개인의 리더십이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절실하다는 결론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계급의 문제, 노동의 문제가 계속적으로 공론장에서 논의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이며, 이 사회적 합의가 존재할 때에야 정치인이 리더십을 가지고 갈등을 사회화하며 치환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시민사회단체들의 운동이다. 최장집은 학생운동의 종언을 비롯해 운동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제한적으로 본다. 확실히 이제까지의 사회운동은 경제적 중산층 이상만이 전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학생운동 역시 이러한 경향성 위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정당정치를 통해 갈등을 사회화하기 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이 사회화시키지 못하는 갈등들을 의제로 설정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문제 역시 한국의 기존 정당들이 반영하지 못하는 이상은, 계속적으로 운동이 관여해야할 몫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계급의 이해관계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정당체제의 건설이 핵심적 과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정당정치가 보장해줄 수 없는 민족, 여성주의, 성소수자를 둘러싼 갈등들에 대해서라면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은 더욱 그 역할이 무거워진다.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의 중산층 이상의 이해관계만을 반영한 시민단체를 뛰어넘어서 성소수자와 여성, 이주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시민사회가 더욱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특히 여성주의는 기존의 ‘가진 자들의 페미니즘’을 넘어서 여성이 지닌 소수성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 있어서 더욱 폭넓게 개입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다 보니 정당정치와 시민사회 운동 중 어느 한 가지만을 중요하게 본다는 것은 결국 학자들의 이론적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편가르기의 진영논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공존하는 개념이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2011년의 마지막, 시대는 변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아닌 서로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합의를 모색하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by Goldmund | 2012/01/02 23:49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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