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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2012 대선에 부쳐 -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4]
2012 대선에 부쳐 -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응답하라 2012, 우리의 선택은 안녕한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는 말이 있다. 지극히 사소한 선택들부터 인생을 결정할만한 중대한 선택들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선택들의 연속일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뽑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2월 19일, 우리의 선택권은 정말 자유롭게 보장될 수 있을까?

잠시 시계를 돌려 5년 전의 선택으로 돌아가 보자. 2007년 수많은 서민들이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약속을 믿고 그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국밥 광고를 통해 유명해진 ‘욕쟁이 할머니’ 강종순 씨는 매출이 반토막나고 월세가 밀려서 시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사투리로 ‘살려주이소’를 외치던 청년백수 이영민 씨는 다니던 일자리를 잃고 지금은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언론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어리석음과 무지함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상황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과 그를 뽑은 사람들에 대한 조롱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의 5년차 국정운영지지도는 언제나 바닥을 기어 다녔다. 특히 2007년 이명박이라는 선택과 2012년 그 선택에 대한 실망은, 2002년 노무현이라는 선택과 2007년 그 선택에 대한 실망과 매우 유사하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집안이 파산했다는 이영민씨가 이명박에 대한 지지연설에서 말한 “노무현을 찍은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는 수사는 결국 “이명박을 지지한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는 식으로 반복될 뿐이다. 5년마다 Cntl+C, Cntl+V 처럼 반복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포기하고 정치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투표율은 매 선거 때마다 역대 최저를 경신하고, ‘뽑을 사람이 없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저 누가 1등이 될 것인가를 놓고 경마 저널리즘에만 바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중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가 하는 결과보다 그들의 정치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하는 문제, 그리고 5년 후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임에도 말이다.

차악을 뽑거나, 그놈이 그놈이거나

흔히들 투표를 두고 ‘차악을 뽑는 행위’라고 말하곤 한다. 투표의 본래 취지가 자신이 지지하는 최선의 후보를 선택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지만, 우습게만 생각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10년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둘러싼 세간의 평가가 그랬다.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와 1% 이내의 접전을 벌이고 석패하자 한명숙 후보의 지지자들은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결과론적으로 노회찬을 지지한 3.3%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오세훈을 시장으로 만드는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이런 주장은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론’으로 한국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진보 정당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가 될 수밖에 없으니 최악을 막기 위한 투표를 하는 것이 올바른 투표라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대부분 선거들은 언제나 ‘민주세력’대 ‘반민주세력’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어 왔으며, 민주세력의 승리를 위해서 좌파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선택할 자유를 빼앗겨왔다. 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의 후보사퇴가 그랬으며, 97년과 02년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의 연이은 승리 또한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론의 결과는 당선된 차악이 곧 최악으로 드러나고, 낙선한 최악이 그 틈을 타 차악의 행세를 하는, 그래서 유권자는 다시 최선보다 차악을 선택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었다. 그 결과 정치인들은 자신이 최선의 후보임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가 최악의 후보임을 보여주는 네거티브 공세와 이미지 정치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특히 이번 대선은 박정희와 노무현이라는 두 전임 대통령의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더더욱 이미지 정치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미지 창출에 몰두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선거는 공약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기반한 구호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올해 대선의 뜨거운 이슈인 ‘경제 민주화’라는 구호 또한 마찬가지다. 2년 전부터 학계와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던 복지국가 담론은 사라지고 후보마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유권자들로서는 그 공약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가운데 ‘경제민주화’라는 실체 없는 구호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차별화되지 않은 후보들 간의 경쟁은 유권자로 하여금 투표의 이유를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대신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를 권리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로, 선택이 아니라 당위의 문제로 해석하는 주장이 그 자리를 메운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20대 개새끼론’을 비롯해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광풍이 몰아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포기하는 것을 의무의 방기라고 해석하는 것은 속편한 해석이다. 투표포기라는 행위는 정치가 그만큼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권리의 행사이기도 하다. 투표는 결코 차악을 뽑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며, 최선의 선택을 투표용지 안에 담아낼 수 없다면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당한 권리의 행사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투표를 포기하는 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에게 존재한다.

‘갈등’의 부재와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갈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적 갈등이란 국회의 공성전과 법안의 날치기 통과, 최루탄 투척 같은 코믹하면서도 폭력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갈등이 없는 정치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며, 그래픽카드 없는 CPU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다양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에 있는데,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에는 다양성이 빠지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이해당사자들 간의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하고, 이런 갈등을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많은 갈등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개인의 문제로 국한될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갈등 대신 ‘통합’과 ‘소통’만이 강조된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대통합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국민을 편가르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문제나 환경문제처럼 명백히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들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힐링하려는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하다. 문재인 후보의 ‘상식이 통하는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정치관을 비상식으로 규정하면서 갈등의 조정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안철수 후보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치를 비효율적인 것, 갈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정치를 혁신하겠다는 주장으로 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예산낭비를 줄이겠다’며 국회의원수 감축, 정당보조금 축소와 중앙당의 공천권 약화를 내세우는 방식의 정치 개혁은 사실 정당을 약화시키는 정치 파괴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필연적인 ‘갈등’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갈등의 사회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할 정당들은 사회의 주요한 갈등들을 공론화시키기를 회피하게 된다. 일례로 올해 대선에서 얘기되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역설 또한 조세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 정당이 갈등의 사회를 포기하는 상황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갈등의 사회화 대신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감정이 이용되면서 지역 기반 정당 체제가 강화되며, 국회의원들 또한 의정활동을 통해 문제제기를 하기보다는 지역구관리에 애쓰게 된다. 정당 체제의 약화는 정치의 책임성 구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에 소속된 박근혜 후보가 같은 당 소속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정체성을 ‘세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또한 정당의 책임정치가 구현된다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정치가 갈등의 사회화와 조정을 포기하면서 사람들은 정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정치효능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는 바로 ‘갈등을 사회화하는 정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동안 20대와 30대의 투표율이 낮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년 문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갈등’으로 의제가 되는 대신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면서, 정치효능감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신의 멘탈을 ‘힐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이라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차악이 아니라 최선을 뽑기 위해

앞서 언급된 정치효능감의 감소가 투표율의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투표시간 연장이 거론되고 있다. 투표시간 연장은 분명, 선거의 결과에 더 많은 비례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투표율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선거제도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들이 필요한 것이다.

학계와 진보정당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결선투표제에 따르면 1차 선거를 치뤄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시, 1위와 2위를 차지한 두 후보는 2주 후에 결선 투표를 통해 승부를 가리게 된다. 만약 결선투표제가 도입된다면 문재인과 안철수는 단일화 방식을 둘러싸고 지루한 싸움을 반복하는 대신 1차 선거에서 2위안에 들기 위해 서로 간의 차별화된 공약을 내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새누리당이 자신의 표 이탈을 막기 위해 전설의 철새 피닉제(이인제)와 다시 손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결선 투표제의 도입은 ‘비판적 지지론’대신 소수 정당과 진보 정당들이 후보를 내서 더 높은 지지를 얻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표를 방지하고 정치적 다원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 1차 투표와 2차 투표 사이에 2주의 시간을 두고서 후보를 검증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과반이 넘는 지지를 얻는 대통령을 탄생시키면서 당선자의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고 국정운영의 동력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결선투표제라던가 정당명부제 등의 도입은 정치적 다원주의와 책임정치 구현의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 그리고 참여다.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가치를 지닌 예술품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다양한 내용물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써의 성격에 있다. 끊임없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독점적 권력의 출현을 방지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런 점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바탕으로 한 행정부의 힘은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한다. 민주주의 권력의 기반인 시민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지만, ‘시민’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정치의 민주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잘 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투표를 기대하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흔히 정치를 두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밥그릇 싸움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란 사회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적인 것인 것이기도 하다. 정치의 장이란 결국 자신이 가진 소신과 생각을 표현하면서 타인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는 일종의 대자적 자아 형성의 장인 것이다.

투표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록 투표용지에 기입된 후보들의 이름에 투표를 하지만, 그들은 사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겠다고 말하는 대리인들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투표란 결국 자신를 위한 선택 행위다. 차악을 선택해야 된다는 주변의 말이나, 시대정신 같은 당위는 당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대변해줄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할 권리가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다.

2012년 12월 19일, 투표장에서 당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저히 나를 위해 싸워줄 사람을 찾지 못하겠다면? 그 때는 차라리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당당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 이 글은 <중앙문화> 63호에 실린 글입니다.

by Goldmund | 2012/12/12 20:38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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