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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0   <남영동 1985>와 리얼리즘의 한계, 그 불쾌를 넘어서기 위하여
<남영동 1985>와 리얼리즘의 한계, 그 불쾌를 넘어서기 위하여

 영화를 보고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산업이 상업화됨에 따라 멀티플렉스에서 여자와 함께 팝콘을 마시며 보는 즐거운 소비행위가 되긴 했지만, 뒷맛 씁쓸한 영화를 찾는 사람들은 있다. 아마도 현재 상영되고 있는 작품 중 그 씁쓸함으로는 톱을 달릴 영화인 <남영동 1985>(이하 남영동)를 보러갔던 대한극장에도, 비오는 평일 저녁 치고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부터 시작해서 나보다 어려보이는 커플도 있었고, 혼자 보러온 사람도 꽤 많아 보였다.

그들에게 <남영동>은 어떤 영화였을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부분 영화의 경우 엔딩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사람들은 한시 바삐 극장을 떠난다. 그러나 <남영동>은 달랐다. 엔딩크레딧에서 재현되는 고문피해자들의 인터뷰영상이 끝날 때까지 한 사람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문득 다른 관객들은 어떤 기분으로 영화를 보았을지 궁금해져 몇몇 관객들의 대화를 엿들어보았다. 어떤 노인 분은 격양된 어투로 독재정권과 그 성격을 잇는 대선 후보를 비난했고, 젊은 남성 하나는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화가 난다고 이야기했다. 2012년, 27년이 지난 지금도 1985년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어느 정도 연장되고 있음을 떠올리면 현실은 불만족스럽게 그지없는 것이 된다.

정지영 감독은 바로 이런 반응을 유도하면서 리얼리즘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자 시도한다. 남영동의 개봉 시점이 11월 말이었던 것 또한 대선을 염두해둔 것이었음은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의 전작 <부러진 화살>이나 영화 <26년>이 판타지적 극화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남영동>은 리얼리즘적 재현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 의도를 위해 정지영 감독은 영화에서 내러티브를 삭제하고 오로지 고문행위와 김종태(김근태)라는 개인의 파괴라는 초점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펼친다. 영화는 시작부터 어떠한 배경 설명도 없이 김종태의 강제 연행 장면을 보여준다. 적어도 영화의 중반까지 고문 행위는 어떤 극적인 장치로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럼에도 대형스크린과 어둡고 밀폐된 환경이라는 영화 장르의 성격 덕분에 관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고문당하는 김종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전기 고문당하는 김종태의 고통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고문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지도 않은 배후 주동자를 자백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김종태를 보며 자신도 그랬으리라 상상했던 것은 아마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갔다온 어떤 친구는 차마 고통스러워서 영화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화의 이런 전략은 분명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으며, 미학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영화 내내 느꼈던 고문의 불편함과 별개로 후반부의 전개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또다른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나중에 장관이 되어 감옥에 갇힌 이두한(이근안)을 찾아간 김종태의 귀에 고문시대의 망령 같은 클레멘타인의 휘파람소리가 들리는 장면이다. 이두한의 사과를 받지만 마음이 불편해져 돌아서는 김종태, 그런 김종태의 두 눈이 클로즈업되면서 스크린을 꽉 채운다. <살인의 추억>이 엔딩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던 방식처럼, 감독은 김종태의 두 눈을 통해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라고.

정지영 감독은 전작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사적 복수를 다뤘다. 이에 비해 <남영동>은 구체적으로 복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사적 복수심을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하기를 시도한다. 현실의 김근태 의장은 결국 최후의 순간에 이근안을 용서했지만, 스크린 속의 김종태는 이두한을 용서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행위가 영화의 메시지에 방해가 되리라는 판단 속에서 삭제된 것이다. 곧바로 엔딩크레딧에서 고문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결국 부조리한 현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노력이다. 김근태 의장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죽었으나, 이근안은 복역을 마치고 교회에서 목사로 지내며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문피해자들의 입을 빌려 대신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대선국면에 영향을 주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온 사람들의 반응을 미뤄볼 때 그의 의도는 한정적이나마 달성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선거에 정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흥행에 성공해 중도층의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양적으로는 큰 영향을 주기 힘들었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질적인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영향력이라는 것의 초점이 대선이라는 분명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영화관의 관객은 1985년과 2012년 현재의 이어짐을 상상한다. 절차적 민주화는 달성되었으나 유신독재의 딸이 대선 후보로 출마해서 노무현의 후계자와 맞붙는다. 고문기술자 이두한과 그의 고문을 명령하는 높으신 분들, 독재와 비민주의 잔재가 일종의 절대악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그 반대편은 자연스럽게 희생자의 위치가 된다. 선악의 양편이 분명해지면 관객이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몫은 자연스럽게 제한된다. 감독의 이런 의도는 엔딩의 클로즈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라는 질문. 이제 관객에게는 정지영 감독의 요구에 따라 현실에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무시하고 잊어버릴까의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정치의 장은 선과 악으로 나눠질 만큼 단순하지 않다. 흔히 우리는 MB 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하지만 87년 체제는 결코 약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 이전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회귀할 만큼의 퇴행은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정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97년 체제의 성립 이후 발생하는 양극화와 불안의 일상화에서 존재한다. 군사독재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 ‘고문’으로 상징되는 신체적 자유에 대한 억압이었다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자유 그 자체보다는 시정적 정의에 의한 분배와 평등의 문제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회의 장면을 통해 국가보안법 존폐 논의를 얘기하면서 멋있는 대통령 노무현을 보여주지만 노무현 정부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노동쟁의와 그로 인해 법적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해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가지는, 그리고 감독이 가지는 명백한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작금의 정치 지형에서 노무현은 노동자의 눈물을 상징하지 않는다. 정치적 중산층들의 도덕적 부채를 자극하는 표상으로 기능할 뿐이다.

남영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결국 용서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복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이번에 중앙문화 63호를 통해 사적 복수심과 국가주의의 구성, 그리고 심판론이라는 당위적 개념으로서의 투표행위를 비판한 바 있다. 근본적으로 선악구도로 만들어진 남영동과 같은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투표의 결과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얼마나 만족스러운 공간인가?

투표는 결코 선악을 판단하여 옳지 않은 것을 삭제하는 행위가 아니다. 반민주적인 새누리당이 사라진다면 한국의 정치는 바로 세워질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믿음. 노무현을 죽이고 김근태를 죽인 누군가에 대한 쌍띠망에서 기인한 이런 믿음은 현 시점에서 역동적 민주주의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소위 제3 후보라고 불리는 영향력 있는 후보들이 줄줄이 사퇴한 가운데 두 명의 후보만이 양자대결을 펼치는 작금의 구도는 87년 민주화 정초 선거 이후 최초의 일이다. 과연 이러한 구도의 성립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은 이제 과거의 유물로 남아 전시되고 있는 기억의 공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은 보는 행위가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바라본 그것은 과연 리얼한가? 영화의 리얼리즘은 오히려 현재적 리얼리티를 은폐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시도할 필요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평론가 허지웅이 <남영동>을 두고 87년 체제 안에 유폐되어 있는 촌스러운 연출이라는 독설을 뱉었던 것 또한 이런 가치판단에서 나온 결론이다. 옳고 그름이 말끔히 나눠지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의는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것은 정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이 가치관에 도전하는 의견들을 묵살하는 폭력이 될 뿐이다. 정치적 장에 있어서 정의란 자신과 동일의견을 지닌 사람뿐이 아니라 반대의 의견을 지닌 사람과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역동적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이상향이 아니라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역동적 과정인 것과 같은 이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관은 변한다. 역사는 이런 점에서 바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 새롭게 구성된다. 박근혜의 역사의식을 놓고 우리가 비판하는 것 또한 그녀에게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한 재구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박근혜의 역사의식을 유신시대에 머무른 봉건적 합리화로 비판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의식이 87년 체제 이전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놓고 투쟁하던 그 시간에 갇혀버릴 가능성에 대해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by Goldmund | 2012/12/20 02:49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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