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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범죄와의 전쟁- 복수전성시대 [4]
범죄와의 전쟁- 복수전성시대

 사형, 복수심에 기초한 최후의 형벌

"만약 당신의 가족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습니까?"

1988년 미국 대선 TV토론회장에서 민주당의 듀카키스 후보는 공화당의 부시(아버지 부시) 후보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듀카키스가 “난 살아오면서 항상 사형제에 반대해왔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냐며 그를 공격했다. 토론 직후 듀카키스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부시는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렇게 가족애가 넘치는 사람이 왜 아들 교육은 그따위로 한 건지 묻고 싶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부시의 승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가족을 죽인 범인의 사형을 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족을 죽인 범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사형을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은 사실상 사형이 폐지된 국가다. 뉴스만 봤다 하면 갖가지 범죄를 저지른 ‘육시랄 놈’들이 가득하지만, 죽이고 싶은 놈을 죽이려면 법의 힘을 빌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 바깥에서의 복수와 영웅을 꿈꾼다. 아이들의 장기를 빼서 장사하던 양아치를 붙잡고 “틀렸어, 너는 지금 그 아이들에게 사과를 했어야해!”를 외치는 아저씨(원빈)는 법이 더 이상 제공해주지 않는 냉혹한 징벌자의 역할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그의 복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당한만큼 갚아주는 복수의 화신 같은 주인공들은 어딘지 모르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법전을 닮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전당포 아저씨도 없고, 템빨로 고담시티를 지키는 다크나이트도 없다. 대부분의 히어로 영화에서 경찰은 번번이 범인을 놓치고 허탕만 치기 일쑤에 주인공을 방해나 하는 역할이지만, 현실에서 악인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경찰과 법원으로 대표되는 국가기구뿐이다.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국가는 범죄자들을 처벌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사적 복수심을 대리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인권이 중요한 가치로 강조됨에 따라 근대 형벌 체계는 신체에 상해를 가하는 대신 그 자유에 구속을 가하고 수감을 통해 범죄자를 재사회화시키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태형, 장형 및 각종 고문들이 금지된 가운데 신체에 직접적인 상해를 가하는 형벌은 오늘날 사형이 거의 유일하다. 2012년 사형제의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형제야말로 법으로 금지된 사적 복수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형집행이 과연 사람들의 복수심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2004년 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살인사건 유가족의 90%가 사형집행 이후에도 그 원한이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원춘에게 사형이 구형된다면 사형제 부활을 얘기하는 사람들의 복수심은 과연 채워질 수 있을까?

아동 성폭행과 ‘도덕’에 기반한 거세형

언제나 뉴스는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만을 들려준다고는 하지만 뉴스를 보다보면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 이후 한동안 성폭행 관련 뉴스가 매일같이 사회면에 올라왔던 9월 즈음의 보도는 정말이지 여기가 무슨 ‘강간의 왕국’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언론은 가해자의 극악무도함과 피해자의 무구함을 대비시키면서 사람들의 감정적 공분을 자아내는 선정적인 기사들을 앞 다투어 쏟아냈다. 아동성폭행에 대한 형량이 외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범죄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달아올랐고 곧이어 아동성폭행 형량을 최대 무기징역까지 확대하는 법령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다양한 대책들이 거론되었는데 이런 대책들 가운데 백미는 역시 성 범죄자에 대한 거세논의였다.

 성폭행범에 대한 화학적 거세(약물치료)가 실제로 성범죄를 경감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효성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이 방안은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화학적 거세에 이어 물리적 거세가 대책으로 진지하게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분노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덩어리가 되어, 세상의 변태성욕자들을 색출하고 격리해야한다는 여론이 된 것이다. 성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 것이 유력방안으로 떠올랐고, 나주 성폭행범이 아동포르노를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동포르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포르노가 성폭행의 직접적 원인이라면 아마 대한민국 남성의 99%는 성범죄자가 되어있을 것이고, 김본좌는 정보통신법 위반으로 구속되기 전에 강간마로 악명을 떨쳤을 것이다. 포르노가 성범죄의 원인이고 FPS게임이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이라는 식의 논리대로라면, 각종 막장 소재들이 난무하는 드라마야말로 한국을 망하게 만드는 악의 축이니, 모든 드라마를 금지시키는 편이 최선의 범죄예방책일 것이다.

2010년 한 조사에 따르면, 강남구보다 구로구에서 아동 및 청소년 대상 성범죄율이 열배 이상 높았다고 한다. 강남구에는 아동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 없고, 구로구에는 많아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런 결과는 사실 성폭행의 핵심 원인이 성욕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 강자와 약자가 나눠지면서 일어나는 폭력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로 맞벌이 가정, 저소득층의 자녀들은 부모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범죄자들이 손쉽게 강자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성폭행범의 성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동성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무시하고, 범죄자 개인의 특수성에만 집중한다. 동시에 생물학적 성욕만을 범죄의 원인으로 꼬집을 수 없기 때문에 ‘도덕’이라는 잣대가 강조된다. 흔히 아동성범죄를 두고 ‘패륜’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 것 또한 아동성범죄가 도덕 프레임에 갇혀있음을 잘 보여준다. 성범죄를 범죄자 개인의 도덕성이나 성욕에 한정짓고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는 방법들은 결국 성범죄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은폐한다.

한국의 성범죄 발생 통계수치는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적 증가를 들여다보면 사실 그리 부정적인 현상도 아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강간범죄가 통계적으로 증가하는 주요한 원인은 과거보다 높아진 신고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신고되지 않는 성범죄들은 많으며, 강간범죄에 대한 불기소율이 49.4%에 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해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로 호들갑을 떠는 것보다 성범죄의 친고죄 규정을 폐지하는 등의 노력에 힘쓰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주폭과 조선일보, 그리고 학내 금주법

세상엔 언뜻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곱씹어볼수록 단어를 만든 이들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씁쓸한 단어들이 있다. 신자유주의라던가 고용유연화 같은 형용모순적인 단어들 말이다. 2012년 우리의 사회면을 장식한 그 씁쓸한 단어에는 ‘주폭’을 빼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주폭은 원래 ‘주취폭력’의 줄임말이지만 ‘주폭척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원래 의미보다는 조폭이라는 친숙한 단어가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술에 취한 범죄자를 조폭과 등치시키면서 범죄자의 단속과 처벌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주폭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은 2011년 충북 경찰청에 의해서였다. 충북경찰청장이던 김용판 청장이 지난 5월 서울경찰청에 부임함과 동시에 주폭척결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캠페인에 최전선에는 조선일보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5월말부터 10월 초까지 [술에 너그러운 문화, 범죄 키운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장장 41회에 걸쳐 기획 기사를 쏟아냈다. (맙소사! 41번이나 같은 얘기를 쓰는데 지겹지도 않나 보다)

물론 경찰과 조선일보가 주도한 이 캠페인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성과도 거두었고,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범죄들에 대해 형량을 줄여왔던 법원의 관행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주취폭력’의 근절을 넘어서 음주행위 그 자체를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주취폭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숙자, 일용직, 이주노동자들이 단돈 1,000원이면 술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노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단돈 1,000원에 쉽게 술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범죄가 벌어진다는 설명은 충분한 것일까? 조선일보 식의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게 되면 범죄의 상당수가 줄어들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1919년 제정되었던 미국의 금주법은 범죄율을 낮추기는커녕, 대규모 마피아의 난립 때문에 오히려 범죄율이 높아지면서 폐지된 바 있다. 범죄의 원인을 ‘술이술이마술이’라는 마법의 주문 때문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손쉬운 접근이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범죄에 있어서 술은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 일종의 매개체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여론은 결국 조선일보가 의도했던 것처럼 음주문화 자체를 문제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얼마 전 ‘대학 내 주류반입 금지법’이 입안된 것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다. 학내 음주 금지는 이해관계의 당사자인 대학생들조차 고려하지 않은 법에 불과하다. 학내 음주가 금지된다고 해서 직장의 회식문화를 비롯해 ‘술 권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악법에 불과하다. 술을 마셔서 생기는 소음이 문제라고 해도 이는 대학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할 일이지,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야할 문제는 아니다. 대학 내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라면, 학내 음주 금지보다는 차라리 캠퍼스 커플 금지 법안을 통과시켜 이들을 올바른 길로 계도하고, 커플들의 과도한 애정표현으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겪는 솔로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편이 몇 배는 더 효과적일 것이다.

게다가 학내 음주 금지법은 학생들의 자치권을 침해하고 동시에 학생 문화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학내 주점과 축제는 학생 자치활동에 있어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는 행사다. 학내 음주 금지는 학생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런 자치활동들을 매우 위축시킬 수 있다. 지금 한국외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이러한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한국외대는 9월 말 보건복지부와 협약을 통해 '교내 음주문화 개선 선언'을 내놓고 학내 주점 설치를 금지했다. 총학생회는 이를 두고 학생자치권 침해라면서 반발했고, 실제로 여기 반발해 주점 운영을 강행한 동아리 회장은 징계에 회부되었다. 학교본부 측에서 축제비용을 삭감하기면서 대립은 격화되었고, 11월 9일 현재 외대 총학생회장이 단식에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언젠가부터 바깥을 나다니기가 무섭다고 느껴진다. 새누리당 정갑윤의원의 지난달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치안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론은 85%였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의 92%가 불안감을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치안은 과연 그 정도로 좋지 않을까? 여행가이드북 ‘론리플래닛’은 한국을 두고 한밤중에 여성이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 하나라고 표현한 바 있다. 사진 자료에서 드러나듯,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은 어떤 나라보다 좋은 치안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지금의 치안상태에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불안이란 감정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불안을 구성하는 것은 객관적인 수치보다 공포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묻지마 범죄’ 따위의 단어가 언론에서 매일같이 보도되면서 나도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대중들 사이에서 퍼지게 될 때, 객관화된 통계자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숫자의 나열이 될 뿐이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얘기했듯 계산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안전이라는 가치는 자유나 평등과 같은 가치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이름의 전체주의가 등장하도록 만든다.

공포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함에 따라 ‘안전’은 국가가 생산하는 공공 소비재가 된다. 그리고 국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사회를 권력자들이 원하는 ‘안전한’ 형태로 재편하고자 한다. 2010년 위헌소지가 있다는 판결을 받고 사라졌던 불심검문이 2년 만에 부활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은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 기꺼이 찬성한다. 이 과정에서 불심검문 부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질서와 안녕’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인권타령이나 하는 ‘씹선비’로 호명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다양한 의견은 감소하고, 사회의 ‘정의’를 위해 법질서를 세워야한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은 정당화된다. 하필 대선이 있는 2012년에 법질서를 강조하고 사형제 부활을 검토하겠다는 대통령후보를 지지하는 보수언론들이 범죄에 관한 보도를 대대적으로 내보내는 이유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정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는 사람들이 언론이 공공선을 위해 법질서의 강화와 엄벌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믿게 만든다. 하지만 전체주의를 한꺼풀만 벗겨서 진실을 엿보자면,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는 세일러문이 아니고 정치인들의 법질서는 문크리스탈 파워처럼 순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의’와 ‘공익’의 이름으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됨에 따라 법질서를 위반하는 노숙자, 외국인노동자들 넓게는 저소득층 전부가 잠재적 범죄자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사회의 공적으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과연 이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 격리가 과연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원하는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는 있는 것일까?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장님이 될 걸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엄벌주의와 법질서 강화라는 일련의 흐름의 핵심에는 ‘불안’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불안의 실체화된 형태로 흔히 생각되는 ‘묻지마 범죄’라는 단어를 한번 분석해보자. 과연 동기 없는 범죄라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어차피 범죄의 피해자에게 있어서 피해자가 동의한 동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죽음에 납득할만한 사유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피해자의 입장에서 모든 범죄는 이유 없는 ‘묻지마 범죄’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범죄의 동기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원한관계와 생계곤란, 각종 스트레스와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까지 이유 없는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언론에 보도되는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거나 실업자, 사회적 외톨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묻지마 범죄’란 결국 사회적 박탈감에 빠진 약자들이 세상을 향해 휘두르는 일종의 복수의 칼날인 것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분)와 이우진(유지태 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를 향한 복수에 나선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각자의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의 복수는 결국 자신의 파멸이라는 비극을 낳았을 뿐이었다. 분노에 기반한 복수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다. 사회정의의 실현이란 이름으로 엄벌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복수심 또한 마찬가지로 묻지마 범죄 같은 형태로 되돌아올 뿐이다. 범죄자를 엄벌에 처하고, 그들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면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범죄행위를 도덕적 일탈로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야동을 단속하고, 술을 단속하고, 게임을 단속하려는 법령들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 버지니아대에서 한국인 유학생에 의해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한국 사회는 범죄자를 향해 분노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대학 측은 피해자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미국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이 범죄의 원인임을 강조하면서 인종 차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주문했다고 한다. 복수심에 기반한 엄벌주의는 증오에 의한 범죄들을 해결할 수 없다.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에 앞서, 그들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 중요한 이유다. 우토야섬 학살 사건 1주년을 맞아 있었던 추도식에서 노르웨이 총리의 연설문 일부를 인용해본다.

우리는 작은 나라이지만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받은 상태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단순한 대응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노동당 청년캠프에 참석했던 한 소녀가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세요"

사랑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낭만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의 고비를 빠져나온 소녀가 범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다른 비극을 막자는 말을 하고, 총리가 더 많은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그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형량을 부과하는 국가지만 범죄율과 재범률이 매우 낮은 국가이기도 하다. 범죄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사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범죄와의 전쟁’을 승리하는 방법이 아닐까?



- 이글은 <중앙문화> 63호에 실린 글입니다

by Goldmund | 2012/12/26 13:40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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