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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4   청년 국회의원의 탄생, 그리고 세대론이란 함정 [6]
청년 국회의원의 탄생, 그리고 세대론이란 함정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김광진’이나 ‘장하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혹은 ‘김재연’이라는 이름은 어떤가?

이 세 사람은 지난 4.11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다. 그 것도 여러분 청년들의 권리를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청년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 히어로 지망생들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세 명 당선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 어쩌면 김재연 당선자는 최근 악명이 높아졌으니 알 수도 있겠다만, 그게 청년 비례대표이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그들의 이름이나 공약을 모르는 게 당신의 문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쪽이야말로 정치 오타쿠(?!)가 아닐지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준석’과 ‘손수조’라는 이름은 어떤가? 여전히 그리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앞의 세 사람보다는 좀 익숙한 이름이지 않은가? 이들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알려진 새누리당의 20대 정치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딱히 ‘청년’이라는 단어를 앞에 내세우지 않았지만, 야권의 청년후보들보다 더 인지도 높은 정치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은가? 그들이 ‘청년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청년정치인으로서 더 유명한 쪽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치 누구나 야권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한 선거를 새누리당이 승리한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소위 ‘멘붕’시킨 4.11 총선 결과를 놓고 갖가지 해석과 원인분석이 난무했다. 그런데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서 청년 비례대표 선출이라는 실패한 이벤트에 대해 분석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직 당선자들의 의정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기에 실패라는 표현은 가혹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 따위 오디션 프로그램을 베낀 동기를 감안한다면 ‘이벤트’로서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대신 청년들을 향해 돌아온 사회의 싸늘한 시선은 있었다.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20대 개새끼론’이 그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당일 트위터 상에서는 20대 투표율이 27%였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 투표율은 8%였다는 괴소문이 엄청난 속도로 유포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 괴소문이 가라앉은 것은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은 45%로 30대의 그것보다 높았으며, 그 중에서도 서울은 64%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였다. 그리고 이 결과가 나오자 갑자기 여론은 뒤바뀌면서 20대들의 투표참여를 칭찬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언제는 청년이 정치에 참여해야 나라가 바뀐다면서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만들더니, 선거 결과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자 ‘청년’은 근거도 없이 ‘개새끼’가 되었다. 그리고 개새끼들이 알고 보니 개새끼가 아니었다는 뉴스가 나오고서야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투표 안하면 개새끼, 투표하면 개념찬 청년. 이건 뭐 쑥과 마늘 먹으면 사람된다는 단군신화도 아니고...

기획부터 실패한 이벤트 -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서바이벌을 하겠다고뤠?

그러니까, 때는 작년 12월 민주당 대표 경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괴랄한 이름을 가진 시민운동의 대표였던 문성근 씨는 청년 비례대표를 국민의 손으로 뽑겠다며 슈스케식 공천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투표 결과 문씨는 2위로 최고위원이 되었고, 그의 아이디어에 따라 청년비례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 프로그램 ‘락파티’의 홍보 및 후보자 접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통합진보당이 ‘위대한 진출’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비례대표 1명을 선출하기 위한 이벤트에 합류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민주통합당이 기획한 이벤트는 완전히 쪽박이었다. 청년 비례대표 후보와 선거인단을 모집결과, 지원자 숫자는 389명, 선거인단 숫자는 1만 7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당초 목표치가 10만 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흥행실패였던 셈이다. 민주당은 당초 예상보다 흥행이 저조하자, 처음 공약했던 것과는 달리 4명의 청년비례 후보 중 두 명만을 당선권에 배치하는 꼼수를 부렸지만, 그마저도 아예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통합진보당이 기획한 ‘위대한 진출’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 운명을 겪었다. 통합진보당의 출마자는 49명이었고, 선거인단 숫자는 민주당보다는 많은 4만 9천여 명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 중 절반은 통합진보당의 청년당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외부참여는 민주통합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숫자에 그쳤다. 결국 두 야당의 청년비례대표 경선은 모두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한 셈이다.

청년 비례대표 경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라진 원인은 간단하다. 애초부터 치밀한 고민 없이 서바이벌 프로그램 방식을 차용한 것 자체가 비례대표 경선 방식으로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사치로 여기는 것이 현실이고, 20대의 상당수는 정치 자체를 혐오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판을 깔아줄테니 재롱 한 번 부려봐라"는 식의 이벤트에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경선 심사과정 또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1차에서 서류와 동영상, 에세이 등을 심사하고 2차에서 심층면접을 통해 최종후보들을 확정하는 과정은 마치 기업의 입사 테스트와 유사했는데, 심사기준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탈락자들이 투명성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3차경선 과정이었다. 최종적으로 당선자 선출을 앞두고 추려진 통합민주당의 16명 후보, 통합진보당의 5명 후보들 중에서 선거인단 투표 1위를 기록한 사람이 최종 후보가 되는 것이 경선 룰이었다. 문제는 이런 경선 룰 때문에 최종 후보 모두가 자신의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선거인단 숫자를 늘리는 일에만 신경쓰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1차와 2차 오리엔테이션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다 하더라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부진하면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정책 선거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조직 선거만이 남은 것이다. 물론 조직선거가 무조건적으로 비판받아야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초에 직접민주주의적 참여라는 취지와 매우 거리가 멀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과정은 민주통합당의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위대한 진출’에서는 김재연 후보가 최종 승리했지만, 당초 공약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경쟁자들보다 뒤져있음에도 불구하고 2위와 3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것이 논란의 불씨였다. 모바일 및 인터넷 투표 서버의 소스코드가 투표 진행 중에 변경된 것이 발견되면서, 최종 경선에 올랐던 다른 후보 측에서 결과 조작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있기도 했다.

결국 이 의혹은 총선이 끝난 이후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김재연 당선자는 통합진보당의 최고 유력 계파에 소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선 프로그램의 관리자들이 그 유력 계파 소속이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시작부터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소스코드 변경 자체가 결과 조작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100%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소스코드 확인만으로도 중대한 부정행위이며, 특정후보를 밀어주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청년비례대표 투표는 취지와 다르게도, 자신의 조직과 계파를 활용해서 경쟁자들보다 많은 표를 동원하는 형태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가 분명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면 당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로 외부 경선인단을 다수 확보해야 했으나 이런 노력은 매우 부족했다. 특히 민주통합당의 ‘락파티’는 판만 벌려놓고 정작 중앙당 차원에서 언론 등을 활용한 홍보가 매우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다. 단순히 청년 중에 4명을 뽑아서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다는 공약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벤트를 하려는 의도였다면 그것을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슈퍼스타K가 보여주었던, 인물 하나하나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작업, 새누리당이 보여주었던 손수조 마케팅이야말로 민주당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청년 국회의원은 과연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청년 비례대표라는 기획이 탄생한 계기는 새누리당에서 만든 것이었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작년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 비상대책위원 중 한 사람으로 당시 27살의 이준석 씨를 임명한 것이 큰 화제가 된 것이다. 물론 그의 기용은 박근혜 위원장의 ‘간택’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준석이라는 20대 정치인의 등장이 야권에게 자극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문성근씨는 인터뷰를 통해, 새누리당은 한 사람의 청년을 자리에 앉혔을 뿐이지만, 우리는 몇 명의 청년 정치인에게 문을 열어주겠다면서 공공연히 이준석 비대위원을 의식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이준석 비대위원의 등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중 한 가지 중요한 지적은, 그가 과연 청년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지적이었다. 이준석은 과학고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얘기하는 청년 정치란 과연 어떤 정치를 뜻하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이준석이 과연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인인지에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 대해 이준석 비대위원은 자신은 20대를 대표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는 명쾌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 대답엔 문제가 하나 있다. 이준석의 말처럼 20대 정치인이 꼭 20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20대, 그리고 청년들의 목소리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대변해야하는 것인가? )

이쯤해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우리가 청년정치를 얘기한다고 할 때, 과연 청년정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청년에 의한 정치’인가? 혹은 ‘청년을 위한 정치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는 전제가 되는 질문이 하나 필요하다. 과연 ‘청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분은 ‘청년’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떠올리는가? 아마도 대부분 자신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릴 것이다. 대학생은 대학생을 떠올리고, 직장인들은 직장인을 떠올릴 것이며, 고졸은 고졸을 떠올릴 것이다. 게다가 대학생이라고 해도 수많은 범주의 대학생이 존재할 것이며, 직장인 안에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청년’이다. 이준석도 청년이고, 고졸에 공장에서 일하는 알바생도 청년이다. 서울대 출신의 고시합격자도 청년이고, 지방대 출신의 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도 청년이다. 뭔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위화감이 들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청년’이라고 부르는 집단적 정체성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청년이라는 것을 하나의 계층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이해관계라는 것은 굉장히 드물다. 도대체 청년이 하나의 계급적, 계층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마저 모호하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자면, 계급의 구성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경제력에 있을 뿐 생물학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청년’이라는 것을 묶어서 일종의 동일한 집단인 것처럼 부르고 있다.

결국 우리가 청년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정체성은 사실 생물학적 나이밖에는 없다. 결국 정치권이 청년이라는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를 대표하기 위한 국회의원을 만들겠다는 이유는 자신들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흔히 2030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투표장으로 나와야 야권의 승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야당에서 청년비례대표를 만들지만, 새누리당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굳이 청년이라는 집단을 대변하는 정책을 만들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청년이라는 집단이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애매한 상황에서 야당의 정치인들이 청년국회의원을 만들려 했던 의도는 간단하다. 20대를 투표장으로 향하게 해서 선거에 승리하려는 정치공학적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정치공학적 계산이 그 자체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준석과 손수조가 새누리당에 의해 ‘간택’되었음을 비판하는 야당이야말로 20대를 진정 정치적 주체로써 바라본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보인다. 그들이야말로 청년비례대표를 일종의 장기말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나?

한 가지 더 지적해야할 부분은, 20대를 위한 정치가 반드시 20대에 의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물론 20대가 그만큼 능력을 키워서 정치를 한다면 상대적으로 20대들의 이해관계를 좀 더 잘 대변해주리라는 기대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기대 역시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반드시 여성의 권익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박근혜가 과연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인가에 대해서는 여성계 내부에서도 논쟁이 분분한 상황이다.

게다가 어느 집단의 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그 집단의 이익을 반드시 달성하는 것조차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대표해야할 집단보다, 자신을 대표로 만들어준 집단의 이익에 더 봉사하게 될 수도 있다. 통합진보당 김재연 당선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청년을 대표해 당선되었고,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계파의 이해관계를 통해 당선되었다. 그런데 만약 청년의 이해관계와 계파의 이해관계가 대립된다면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할까? 지금까지 김당선자가 보여준 행동을 볼 때 후자를 선택할 것은 분명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청년의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한 청년비례대표가 탄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례대표로 선출된 사람의 전문성, 선출된 권력이 우리를 대표하는 것인지 보장하기 위해서 감시해야할 제도적 장치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제도적 장치가 구실을 다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꼰대들의 청춘담론을 거부하며, 세대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언젠가부터 각종 매체에서 G세대니, 실크로드 세대니 하면서 청춘에 대한 얘기들이 넘쳐난다. 이런 청춘 담론들의 시초가 되었던 책이 바로 2007년에 출간된 <88만원 세대>였다. 얼마 전 공저자인 우석훈씨는 <88만원 세대>의 절판을 요청하면서 그 이유를 블로그에 올렸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는, 20대가 토익책 대신 짱돌을 들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 믿고 책을 냈는데 이 책이야말로 20대가 움직이지 않는 알리바이가 되었다면서 “청춘이여, 정신 좀 차려라”는 말을 남겼다.

오 마이 갓~! 자신의 책 한 권이 세상을 극적으로 바꾸리라는 허무맹랑한 기대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결론이랍시고 한다는 말이 결국 “너넨 안돼”라는 꼰대질이다. 도대체 이런 사람의 주장 이후에 각종 세대론이 등장했다는 사실조차 화가 나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결국 모든 문제를 다시 청춘에게 돌리는 우석훈의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목사아들돼지’ 김용민의 20대 개새끼론이란 걸출한 작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청춘에게 짱돌을 들고 일어서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과 20대 개새끼론을 말하는 이들이 사실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20대 투표율이 27%라는 괴소문을 두고서 20대 개새끼론이 재등장했다가, 갑자기 개념찬 청춘을 칭찬하는 여론이 만들어졌던 것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20대가 자신들의 입맛대로 움직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20대를 사람 취급하느냐 마느냐라는 결론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기에 20대는 자신들과 동등한 정치적 주체가 아닌 미성숙한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20대를 동원해야만 한다.

민주통합당이 청년 비례대표 후보 16명을 이끌고 홍성교도소에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의 면회를 갔다가, “나꼼수의 인기를 얻어 타려한다”며 비난 받았던 사례, 최종당선자 4명을 모두 국회에 보내겠다고 공약했다가, 흥행이 실패하자 조용히 2명만을 당선권에 보낸 꼼수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 20대의 정치적 열정을 동원했다가, 그게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기 보다는 돌아서서 20대에게 칼을 꽂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20대를 동원하려할 뿐,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진보진영에서 제기하는 각종 청춘 담론과 세대론들 중 상당부분은 20대의 정치적 열정을 동원하기 위한 기획으로 탄생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막상 세대론의 당사자인 20대 사이에서도 세대론을 대하는 태도는 갈린다. 세대론과 관련해 목소리를 높이는 20대 필자들은 정작 명문대생들인 경우가 많고, 정작 88만원으로 현실을 버텨야하는 이들은 세대론에 시큰둥하다. 세대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먹고 사는 일이 힘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어서다. 고려대생 김예슬의 대학거부선언은 주목받았지만, 반값등록금 정국에서 단식투쟁하는 목원대생 김아무개씨는 화제가 되지 않는 현실. 세대론은 이미 명문대생들의 인정투쟁 담론과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자기 최면 마케팅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낡은 세대론을 버린 다음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이를 위해 다시 세대론의 바이블 <88만원 세대>로 돌아가보자. 우석훈과 함께 책을 공저했던 박권일은 <88만원 세대>를 통해 세대론이라는 기획 그 자체보다는 88만원이 상징하는 ‘불안정노동’이 전면화되는 매우 계급적인 현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세대론은 일종의 우회적 전달로였다고 설명했다.

박권일의 설명은 우리가 세대론을 강조하면서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사실 일종의 계급담론으로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88만원세대에 나타난 20대와 386세대간의 대립만 보더라도 사실 세대 간 대립보다는 계급 간 대립의 성격을 더 크게 가지고 있다. 88만원세대의 상층이 386세대의 상층을 적대하는가? 그렇지 않다. 88만원 세대의 하층은 386세대의 하층을 적대하는가?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다. 적대는 명백하게 88만원 세대의 하층과 386세대의 상층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같은 20대 사이에도 상층과 하층사이에 발생하는 적대가 증가하고 있다. 인서울과 지잡대라는 대학서열의 차이, 강남과 강북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적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학력조차도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면서 적대는 더욱 커질 것이다.

물론 현실의 세대론은 단순히 <88만원세대>에서 보여주는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2030세대와 50대 이상의 정치적 성향에 차이가 있음은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일 뿐이기에, 세대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현존하는 많은 세대론들은, 세대간의 당연한 차이와 젊은이들에 대한 원망을 뒤섞으면서 무엇이 중요한지조차 망각해버린 채 당위가 되어버렸다.

세대론은,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갈리는 것이 아닌 것이며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다시 읽어야한다. ‘청년’이라는 집단을 완벽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청년’을 하나의 계층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청년이라고 부르는 집단의 대다수에게 적용되는 상상적 이해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청년실업, 높은 등록금부담, 살인적인 주거비용, 고용의 불안정과 같은 문제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청년’의 문제인 동시에, 청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전반의 차원에서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재 제기되고 있는 청년 이슈가 해결될 방법은 없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맺으며 :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이기에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는 계속해서 요동칠 것이다. 그리고 연말까지는 20대의 표를 동원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필요성 때문에 세대론은 계속해서 우리 주위를 맴돌 것이다. 청년이 투표를 하면 나라가 바뀐다면서 어떻게든 2030의 투표율을 높이고자 할 것이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20대 개새끼론과 같이 청년 세대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경향 역시 계속될 것이다. 청년 정치라는 단어는 앞으로도 얼마간 20대를 동원하기 위한 수사학으로밖에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치라는 기획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판단은 이르다. 청년국회의원이 된 민주통합당의 김광진, 장하나씨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이 의정활동 과정을 통해 청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비례대표에게 요구되는 전문성과 기량을 인정받는다면, 청년 정치라는 기획은 충분히 일회성 선거공학 차원을 넘어서 시대적 요구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청년 국회의원들의 활약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청년 국회의원이라는 기획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청년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있는 당사자들이 있다. 청년들의 노동권 향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과 같은 단체들이 있었고, 총선 직전에는 청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겠다는 정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들이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서 특히 각 정당별로 존재하는 청년위원회, 대학생 위원회 등의 청년 조직의 확장이 필요하다. 현재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라는 양대 정당의 청년 조직은 거의 유명무실한 수준에 불과하며,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의 청년 조직 또한 정당의 정책 및 의사 결정과정에 중요한 위원회로 인정받기 보다는 정당의 사업에 필요한 머릿수를 채워주는 역할에 동원되는데 그치기 일쑤였다. 정당에서 청년당원의 목소리마저 반영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당 외부 청년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청년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슈퍼스타K와 위대한 진출이라는 오디션 속에서 심사위원에게 잘보이기 위해 각개약진하는 경쟁자들이 아니라, 청년 조직 속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전문성을 익혀나가게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인자살률을 지닌 나라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노인문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것은 노인이라는 계층이 지닌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양극화와 개인화 속에서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청년 문제도 마찬가지다. 청년의 이해관계는 결코 특수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결국 많은 집단들에게 해당되는 사회적, 경제적 이해관계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

청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도는 결국 한국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거대한 전환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 전망은 불투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채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삶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나 하나부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나서지 않는다면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청년 자살률 1위, 대한민국. 오늘날 우리의 고통은 많은 부분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면 고통을 극복하는 것 또한 개인의 몫으로 오롯이 돌아와서는 안된다. 정치적 변화들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 내 몫을 찾기 위한 모든 시도들이야말로, 정치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 느끼는 수많은 20대들이여! 부디 정치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혐오를 그만 거두기를.



- 이 글은 <중앙문화> 62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by Goldmund | 2012/06/24 23:29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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